독소를 정제한 의약품...두 얼굴의 보톡스 

입력
2021.10.05 05:30
16면

편집자주

일상 속 생명과학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여행하는 과학쌤’이란 필명으로 활동 중인 이은경 고양일고 교사가 쉽고 재미있게 전해드립니다.


보톡스의 주성분인 보툴리눔 독소는 신경과 근육의 활동을 방해하는 단백질이다. 중독될 경우 호흡 곤란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지만 근육 수축을 억제하는 효과 덕에 미용 목적으로 많이 사용된다. 게티이미지뱅크

보톡스의 주성분인 보툴리눔 독소는 신경과 근육의 활동을 방해하는 단백질이다. 중독될 경우 호흡 곤란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지만 근육 수축을 억제하는 효과 덕에 미용 목적으로 많이 사용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추석부터 개천절, 한글날까지 달력의 빨간 숫자들이 반가운 요즘이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모임을 하거나 여행을 떠났을 텐데 할 수 있는 활동이 제한돼 아쉬운 마음도 맴돈다. 평소와 다르게 눈길을 돌리다 보니 연휴를 보내는 사람들을 위한 병원 광고가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외적인 변화를 통해 자신감을 높이라는 광고들 틈에서 작고 예쁜 얼굴형을 만들어준다는 보톡스의 효과가 눈에 들어왔다.

보톡스는 보툴리눔 독소가 주성분인 의약품이다. 이 독소는 보툴리눔이라는 세균이 만들어내는 단백질인데, 보툴리눔균은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손상을 입은 채 밀봉된 통조림 캔 등이 주요 서식처다. 실제로 멸균 처리 없이 밀봉해 보관한 소시지를 먹고 집단 식중독으로 사망한 사례를 통해 이 독소 단백질이 처음 발견됐다. 소시지를 뜻하는 라틴어인 보툴러스(botulus)를 어원으로 세균의 이름을 명명했으며, 이후에 소시지 외 다양한 통조림 식품에서 같은 종의 세균과 독소가 발견됐다.

보툴리눔 독소는 신경과 근육의 활동을 방해한다. 사람의 심장과 호흡기관 역시 신경과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작동하기 때문에 보툴리눔 독소에 중독될 경우 호흡 곤란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신경계를 이루는 기본 단위인 뉴런(신경세포)은 신호를 전달하는 기능에 특화된 기다란 축삭돌기를 가지고 있는데, 축삭돌기의 말단 부위와 근육은 아주 작은 틈을 두고 접해 있다. 뉴런의 축삭돌기 말단에서 방출된 신경전달물질이 인접한 근육세포에 있는 수용체에 결합하면 비로소 근육의 수축이 시작된다. 체내로 들어온 보툴리눔 독소는 이 신경전달물질이 정상적으로 방출되지 못하도록 저해하기 때문에 근육이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잘못 섭취하면 목숨이 위험해질 만큼 무시무시한 독소지만, 근육의 수축을 억제해야 하는 좁은 범위에 극소량을 사용한다면 약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사시, 경련, 근육긴장이상증 등 근육의 과도한 수축과 관련된 질병을 가진 사람에게 주사했을 때 치료 효과가 커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의약품 사용 승인을 받았다. 나아가 주름이 개선되고 얼굴 윤곽이 갸름해지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보였기에 지금은 미용 목적으로 더 많이 사용된다.

미용 목적으로 주사한 보톡스의 효과는 영원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보툴리눔 독소가 서서히 분해되거나 뉴런의 축삭돌기 말단이 새롭게 분지되어 근육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지속적인 효과를 위해 주기적으로 보톡스 주사를 맞는 경우도 있는데, 때로는 내성이 생겨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기도 한다. 같은 종류의 보툴리눔 독소를 짧은 기간 내에 반복해서 주입하면 독소 단백질의 입체구조를 인식하는 기억세포가 생성, 강한 2차 면역반응이 일어나 독소의 작용을 막을 수 있다.

음식을 충분히 익혀 먹으면 보툴리눔 독소에 의한 식중독을 예방할 수 있는 것도 보툴리눔 독소가 특정한 구조를 지닌 단백질이기 때문이다. 높은 온도에서 오랫동안 가열하면 단백질의 입체구조가 변형되면서 독성이 사라진다.

얼굴의 주름이나 늘어진 턱도 가볍게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약으로도 독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 두 얼굴의 보툴리눔 독소처럼 젊음과 나이듦 모두 나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끌어안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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