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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2년 소비에트 '감옥' 목회

입력
2021.10.1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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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월터 시제크

교황청 선교사로 파견됐다가 소비에트 스파이로 만 22년 수형생활을 한 월터 시제크.

교황청 선교사로 파견됐다가 소비에트 스파이로 만 22년 수형생활을 한 월터 시제크.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만 17년 재임(1922~39) 중 외교와 선교 분야에서 선명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해묵은 ‘로마 문제’ 즉 바티칸 시국의 주권을 보장받고 막대한 보상금을 얻는 조건으로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을 인정한 라테라노 조약(1929)을 체결했고, 교회 박해가 극심하던 혁명 직후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공격적인 선교로 냉전의 불을 돋웠다.

주폴란드 교황청 대사 시절 소비에트 침공을 겪은 그는 확고한 반공주의자였고,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교황 취임 직후 그는 소비에트 선교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독려했다. 그 요청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출신의 월터 시제크(Walter J. Ciszek, 1904~1984)가 응했다. 폴란드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나 1928년 예수회 수련수사가 된 그는 러시아 선교에 자원한 뒤 교황청 러시안대학서 신학과 러시아어 등을 익히고 1937년 동방교회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2차대전 기간 중 위장 신분으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거쳐 1940년 우랄산맥 인근 추소보이(Chusovoy)에 터를 잡고, 벌목공으로 일하며 선교와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41년 러시아 내무성 비밀경찰(NKVD)에 체포돼 고문, 취조 끝에 스파이 혐의로 15년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았고, 약 5년간 모스크바 루비앙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뒤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석탄 광부 등으로 1955년까지 노역했다. 그는 석방된 뒤에도 비밀경찰 감시하에 크라스노야르스크 등지서 노동자로 일했다. 훗날 그는 수형기간 중에도 기도와 선교활동은 멈추지 않았다고 자서전에 썼다.

러시아 입국 이후 연락이 끊겨 숨진 것으로 알던 교황청과 그의 가족들은 1955년 그의 편지를 받고서야 생존 사실을 알게 됐고, 미국서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와의 교환을 통해 1963년 10월 12일 생환했다. 말년의 그는 순교자와 맞먹는 영광을 누리며 고난의 헌신을 세상에 알렸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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