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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책로에 서서

입력
2021.10.01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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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산책길 옆으로 잘 조성한 마을 텃밭이 보였다. 그 밭 저쪽에서 세 아이가 세상모른 채 땅을 파고 있었다. 목덜미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저 아이들을 몰두하게 만드는 게 대체 뭔지 궁금했다. 내가 다가설 때까지도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땅 파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얘들아, 여기서 뭐 하니?" "두더지 잡고 있어요. 보세요, 두더지 굴이 엄청 많아요."
사내아이 하나가 땀으로 흥건한 얼굴을 치켜들고 대답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흙이 불룩하게 솟아오른 두더지 길이 밭 여기저기에 기하학적 무늬를 그려놓고 있었다.

두더지라, 저 두더지를 잡겠다고 몇 날 며칠 아침 밥숟가락 놓기 무섭게 냇물 건너 모래밭으로 달려가던 날이 있었다. 누구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던 건지 모르겠다.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의 오후, 동네 아주머니들이 왁자하게 수다 떠는 빨래터를 기웃거리다가 그 말을 들었던 것만 기억한다. "그 뭣이여? 살이 투실하게 오른 두더지를 잡아다가 푹 고아 멕이믄 앉은뱅이 소아마비 환자도 벌떡 일어난다고 하대." 그 말이 여섯 살 내 귀에 꽂혀버렸다. 그즈음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는 고민을 속으로만 삭이던 나는 하느님이 우리를 어여삐 여겨 마침내 동아줄을 내려주셨다고 믿었다. '이제 우리 셋 다 학교에 들어갈 수 있겠구나.'

아래위로 이웃해 살던 우리 셋은 말문이 트일 때부터 함께 자랐다. 온종일 어울려 '이거리 저저리 각거리' 놀이를 하고, 민화투를 배웠다. 그렇게 앞다퉈 한글과 산수를 깨우치던 어느 날, 걷지 못하는 친구의 아픈 다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입학을 반년도 남겨 두지 않은 때였다. "엄마, 우리 세 명 다 학교에 갈 수 있는 거지?" "아니." 오랫동안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작고 단호하던 엄마의 대답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다 두더지 이야기를 들었고, 다른 한 친구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우리 둘은 잽싸게 움직였다. 매일 아침을 먹기 무섭게 차가운 냇물 건너 하천부지 밭으로 달려갔다. 한 손에 작대기를, 다른 손에 호미를 쥐고 추수한 배추밭 위로 어지럽게 솟아오른 두더지 굴을 들쑤셨지만 보름이 넘도록 두더지 털조차 볼 수 없었다. 설상가상 비밀 계획마저 어른들에게 들켜버린 우리는 아픈 친구를 찾아가 "우리 둘만 학교에 가서 미안해"라며 엉엉 울었다. 친구는 놀랄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날이 올 줄 나는 알고 있었어. 대신 매일매일 학교에서 배운 거를 나한테 와서 가르쳐 줄래?" 꼭 그러마 약속했지만, 학교라는 새로운 세상에 편입된 우리가 그 약속을 온전히 지켰을 리 없다. 오래지 않아 친구가 특수학교에 입학했고, 수학적 재능 덕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운다는 소식을 무심하게 들어넘기다 혼자 자문했었다. 영악하게도 그때 나는 두더지 굴을 헤집는 것으로 친구에 대한 죄책감과 우정마저 말끔히 상쇄해버린 건 아닐까.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두 친구와 몇 년 전 연락이 닿은 후 가끔 안부를 전한다. 그렇더라도 우리 셋이 다시 모여 무릎 마주 대고 편하게 이야기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쓸쓸하고 가슴 서걱거리는 이야기들.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행스럽게도, 텃밭의 세 아이는 날이 저물도록 멈추지 않고 두더지를 잡을 기세로 땅만 파헤치고 있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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