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냉장고가 들어오던 날

입력
2021.10.03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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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사실 고장이야 한참 전의 일이다. 툭하면 성에가 끼고 냉기가 사라지는 놈을 고쳐보겠다고 AS기사를 세 번이나 불렀건만 회복은 헛된 바람이 되고 말았다. 이 집에 들어온 지 10여 년, 새로 들일 때가 되기는 했어도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번역료 수입으로, 어디 기백만 원 하는 냉장고 교체가 애들 이름처럼 쉽게 나오느냐 말이다. 미루고 미루다 아까운 시간과 수리비만 더 나가고 만 꼴이다.

냉장고 교체는 세탁기, 에어컨, 보일러 같은 대형가전과 또 차원이 다르다. 그런 물건이야 전문가가 와서 처리해주면 그만이지만, 냉장고는 내용물을 모두 빼낸 다음, 버릴 것은 버리고 쓸 물건은 닦고 정리해서 새 냉장고에 다시 넣어야 한다. 게다가 대용량인 만큼 그 일이 절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냉장고가 들어오는 날, 아내는 장모님 병수발 가야 한다며 "냉장고를 부탁해", 한마디 던지고는 훌쩍 달아나버렸다. 그나마 집에 있는 아들, 딸에게 "아빠를 부탁한다"고 한마디 덧붙이기는 했다.

오래된 냉장고는 신비의 토굴과도 같다. 냉장고만큼이나 오래된 식품에서,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하는 물건들까지 없는 게 없다. 나는 아이들과 작전을 짰다. 유통기한 지난 상품, 정체가 애매한 물건, 더 이상 쓰거나 먹지 않을 음식 따위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버리기로 했다. 우리는 그렇게 냉동실 3분의 2, 냉장실도 절반 가까이 비워 냈다. 아내가 있었던들, 이것도 검사하고 저것도 회수해 작업시간이 배는 걸렸을 터였다. 아내의 부재를 이용해 큰 도발을 한 셈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다. 가난한 글쟁이가 거금을 날린 일이다. 최신형 4도어를 황급히 마련하느라 가격도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그보다 아까운 건, 그간 손수 재배하거나 채취해 겨울양식으로 비축해놓은 각종 나물들이다. 껍질을 하나하나 벗긴 후 살짝 데쳐서 얼려놓은 고구마순, 몇 년 전 만들어놓은 바질페스토, 깻잎순, 다래순, 냉이 등등… 함께 얼린 수분이 녹아버리는 통에 다시 냉동해야 맛도, 식감도 떨어질 게 뻔했다. 결국 귀한 식재료와 함께, 준비하느라 소비한 시간과 노력과 애증까지 모두 버려야 했다. 거기에 씻고 닦고 정리하느라 한나절을 생으로 날렸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는데 순간… 맥이 풀리기는커녕 기이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뭐랄까… 엄청난 혁명을 해치우고 새 출발을 앞둔 기분?

살림이 어설플 때 구입한 냉장고였다. 정리가 뭔지도 모를 때라 당장 먹지 않을 식량, 쓰지 않을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집어넣고, 때로는 잊고, 때로는 찾기 어려워 몇 년씩 방치해왔다. 욕심을 버리자고, 쌓아두지 말고 비우면서 살자고 이곳 시골에 내려왔건만 결국 바보처럼 구석구석, 가득가득 미련과 욕심을 쟁여놓고 살았던 것이다. 세상일도 그럴 듯싶다. 고쳐 쓰지 못할 것은 과감히 내쳐야 하는데 차마 그러지 못해 끝내 사달을 내고 마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승리가 정신승리라고 했던가? 어느새 난 본전 생각도 잊고, 새 냉장고에 다시 넣었던 물건까지 꺼내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잘 쓰는 것은 오른쪽에, 그렇지 못한 것들은 왼쪽에, 키 큰 아이들은 뒤로, 작은 애들은 앞으로, 정체가 모호한 것들엔 라벨을 붙였다. 때로는 우리한테도 혁명이 필요하다.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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