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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진·일기, 그리고 영화까지… 문화로 녹여낸 '한국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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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들과 문화재 전문가들이 그동안 잘 몰랐던 국외문화재를 소개하고, 활용 방안과 문화재 환수 과정 등 다양한 국외소재문화재 관련 이야기를 격주 토요일마다 전합니다.
근대 시기 한국을 방문해 한국 문화를 기록하고 해외에 알린 사람들은 여럿 있다. 하지만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처럼 당시에 흔하지 않았던 새로운 매체까지 동원해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 문화를 기록하고 소개하려고 한 경우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의 초대 총아파스(수도원장)로서 선교지역이었던 한국을 시찰하기 위해 1911년과 1925년에 두 번 방문했다. 체류 기간은 각각 약 4개월과 약 1개월 정도였는데, 놀랍게도 총 5개월 남짓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한국에 머물렀던 경험을 바탕으로 2권의 책을 출판하고 그중 한 권은 재판을 간행했다.
또한 영화심의에 통과되고 교육영화로 인정받은 장편 및 단편 무성영화 2편을 제작하였으며, 단편영화 3편을 비롯한 다량의 촬영본 필름을 비롯하여 1,000점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는 유리건판 등 사진 촬영본, 한국 문화를 스케치한 형태의 작품, 체류기간 동안의 일기 등 한국에 대한 다양한 기록물을 남겼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평가에 의하면 베버가 남긴 필름은 당시의 희소성을 감안했을 때 규모와 구성 면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고 한다.
1911년 그의 첫 한국 방문을 통해 출판된 기록물은 그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출판된 ‘고요한 아침의 나라(1915)’라는 한국 여행기다. 이 책은 그가 쓴 일기를 바탕으로 간행되었는데, 한국 체류 시 겪었던 사건과 자신의 감회뿐만 아니라, 한국의 풍속과 문화에 대한 사진과 삽화를 아우르는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에 흔하지 않은 컬러도판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시각 자료를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진과 삽화에 대한 개별 설명은 많지 않다. 어떤 경우는 해당 이미지가 왜 그 자리에 수록되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곳에 편집돼 있기도 하다.
다행히 이 책에 등장하는 문화재 중 일부는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박물관에 소장되어있음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실태조사 보고서를 통해 밝혀졌고 기초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 출처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는 경우가 많아, 필자는 베버의 책과 영화에 나오는 시각 자료의 비교·분석을 통해 소장기관의 동의를 얻어 베버 컬렉션으로 분류한 바 있다. 더욱이 도판으로 사용된 사진 자료 중 일부는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유리건판 등의 아카이브 자료로 보관되어 있음이 추가 확인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실태조사 사업을 통하여 기초자료를 확보하게 되면 베버가 기록한 한국 문화에 대한 맥락들이 더욱 풍부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베버는 여행기라는 글을 시각 자료와 함께 출판함으로써 독일의 대중이 한국 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인들의 생활용품을 수집해 독일에 가져감으로써 물질문화를 통해 타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의 유용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가 수집한 박물관 소장품은 당시에 소모품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짚신까지도 망라하고 있다.
그는 수집품을 독일에서 전시함으로써 한국이라는 다른 나라에 대한 교육 자료로 활용하였고, 이를 박물관에 소장함으로써 ‘문화재’의 대우를 받게 했다. 그가 문화재 하나하나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보다는, 해당 문화재가 사용되거나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수록한 부분에 이미지를 배치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문화재의 가치가 그 문화재가 속해 있는 문화 안에 녹아 있는 것이고 맥락이 물건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베버의 한국에 대한 첫 번째 기록물은 대중적인 인지도도 얻어 1923년에는 재판본이 발간되기에 이른다.
1925년 베버는 한국에 다시 한번 방문한다. 그의 두 번째 한국 방문을 통해서는 더욱 다양한 매체의 기록물들이 생산된다. 첫 번째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사진과 일기를 남긴 것은 물론이고, ‘한국의 금강산에서(1927)’라는 책을 출판하는 것 외에도 공식적 대중상영을 할 수 있도록 영화심의를 통과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1927)’ 및 ‘한국의 결혼식(1925)’이라는 제목의 장·단편 무성영화 2편을 비롯한 방대한 영상기록물들을 남겼다.
베버의 무성영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그의 첫 번째 방문을 통한 출판물과 같은 이름으로 명명된 무성 장편영화, 즉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1927)’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글이나 정지화면으로만 전달했던 한국 문화를 움직이는 영상으로도 보여주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영화는 35mm 필름 100분 정도의 분량으로, 시가 풍경, 불교 사찰, 금강산 유람을 포함한 당시 한국의 세시풍속, 평생 의례, 생업 등 다양한 분야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담고 있다. 그의 또 다른 무성영화 ‘한국의 결혼식(1925)’이 처음에는 이 영화의 일부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로 연속되지 않은 주제의 짧은 영화가 여러 개 연결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제목의 영상물은 편집이 조금씩 다르지만 같은 이름으로 알려진 버전이 여러 가지 있는데, 이는 지속적인 편집과 복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 상영 목적 또는 관람객을 고려하여 편집이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사실적으로 문화를 전달하기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역시 영상에 사용된 소품 중 일부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실태조사 보고서를 통해 알린 바 있다.
1개월 남짓이라는 짧은 기간의 체류 경험과 촬영을 통해서 이렇게 많은 작품을 산출해 냈다는 것은, 그가 첫 방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상 촬영 주제에 대한 구상을 이미 마치고 영사기를 비롯하여 한국에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 필름 등의 재료를 가져왔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해제에 따르면, 베버가 사용한 영화 카메라는 당시 다큐멘터리 제작에 널리 사용되었던 데브리 파보라고 하는데, 당시 새로운 기술로 떠오르기 시작한 영상 매체를 활용하여 한국 문화를 역동적인 시각 자료로 남기고자 독일에서부터 철저한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성 베네딕도회의 공식 연대기에는 베버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의 주요 업무는 영화를 찍는 일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의 글에 드러나 있듯, 첫 방문에서의 감회로 서술된 사라져가는 한국 문화에 대한 아쉬움이 한국 문화를 더 본격적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추동력이 되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베버는 왜 이렇게 다양한 매체의 기록을 남겼을까. 매체의 특성에 따라 실제가 전달되는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각 매체를 통해 담은 한국에 대한 기록이 상호 보완되어 당시의 한국을 보다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할 수 있는 충실한 자료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닐까. 베버가 한국을 방문하거나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자 한 목적이 선교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사라져가는 문화를 안타까워하며 남겨두려고 하는 생각 또한 중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신기술까지 도입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문화를 기록하고 사실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그의 의도는 과거의 한국을 재구성할 수 있는 충실한 자료로 남아 빛을 발하고 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록된 한국에 관한 자료들은 서로 연계된 정보라는 점에서, 당시 한국 문화를 다양한 측면에서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점은 그가 남긴 기록 중에 아직 정리·분석이 마무리되지 않은 유리건판, 일기장, 인화 사진, 스케치 등 다른 매체를 통한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국외한국문화재를 한국에서 만들어져서 외국으로 반출된 것에 한정한다는 정의가 2017년에 확대된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정의가 ‘외국에 소재하는 문화재로서 대한민국과 역사적·문화적으로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장됨으로써 해석의 여지는 더 커졌다. 낯선 나라와도 같은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의 가치를 발굴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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