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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진단의 과학적-윤리적 해이를 고발한 임상심리학자

입력
2021.10.04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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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a Caplan(1947.7.7~ 2021.7.21)

폴라 캐플런은 임상심리-정신의학계의 느슨한 정신질환 진단 기준을 비판하고 과도한 진단-치료로 피해를 겪어온 이들- 특히 여성과 베테랑-을 옹호한 페미니스트 임상심리학자다. 그는 1984년 '여성 마조히즘의 신화'란 논문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이래 수많은 칼럼과 다수의 책으로 미국심리학회(APA)와 '정신의학진단편람(DSM)'의 부당한 권력과 권위를 고발했다. 권위와 문제점을 고발했다. 1985년의 캐플런. veteranfeministsofamerica.org

폴라 캐플런은 임상심리-정신의학계의 느슨한 정신질환 진단 기준을 비판하고 과도한 진단-치료로 피해를 겪어온 이들- 특히 여성과 베테랑-을 옹호한 페미니스트 임상심리학자다. 그는 1984년 '여성 마조히즘의 신화'란 논문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이래 수많은 칼럼과 다수의 책으로 미국심리학회(APA)와 '정신의학진단편람(DSM)'의 부당한 권력과 권위를 고발했다. 권위와 문제점을 고발했다. 1985년의 캐플런. veteranfeministsofamerica.org

스코트(1896~1940)와 젤다 피츠제럴드(1900~48)의 삶과 파국적인 사랑은 1920년대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상징적 삽화로 기억된다.

남부 명문가 여성 젤다에게 반한 무명 작가 스코트가 '가난한 남자에겐 딸을 줄 수 없다'는 여자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그녀를 주인공으로 소설('낙원의 이편', 1920)을 써서 명성을 얻고, 마침내 결혼에 성공해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파격적인 사랑과 호사로운 파티를 벌여 부부의 가십 전담 기자가 생길 정도로 문화계-사교계의 명사로 주목을 끌지만, 젤다의 과도한 사치와 방탕, 자살 충동 등 정서 불안을 수습하느라 '천재 작가'는 재능과 에너지를 소진하고, 젤다 역시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병원 화재로 숨진 사연.

내도록 저 삽화의 악역은 '미국 최초 신여성(first American flapper)' 젤다였다. 만년의 스코트는 지인들에게 젤다를 '미성숙한(child-woman) 삼류 작가'라 말하곤 했고, 부부의 절친 헤밍웨이 역시 '스코트의 성적-예술적 자존감을 짓밟고, 문학적 감성과 재산을 탕진한 미친 여자(mad woman)'라 평했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헤밍웨이는 스코트에게 "조심해, 저 여자가 자넬 망치고 있어"라고 말한다.

젤다를 위한 변론은 페미니즘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됐다. 하지만 역사적 재심의 결정적 증언은 전기작가 샐리 클라인(Sally Cline)이 2002년 출간한 젤다 전기 'Zelda Fitzgerald: Her Voice in Paradise'였다. 클라인은 젤다의 의료기록까지 뒤지는 6년여 취재를 통해 스코트가 젤다와 함께 쓴 작품에서 젤다의 이름을 지우고, '부부 사생활을 지나치게 드러냈다'며 젤다의 작품을 검열하고 훼손했고, 이혼 요구조차 매정하게 외면하며 젤다의 창작활동을 방해하고 협박한 사실을 밝혔다. 젤다가 여성성에 옭죄어 지낸 자신의 삶을 비꼬듯 "내 삶은 컨페티(파티의 색종이 조각)로 가득해서 종이 인형을 낳을 수도 있을 지경"이라 했고, '위대한 개츠비'의 작중 '데이지'의 말 즉, "(내가 낳은 아이가) 딸이라 다행이야. 걔가 바보라면 좋겠어. 이 세상에서 여자에게 가장 좋은 건 아름다운 바보니까"란 표현이 실은 젤다가 첫 딸을 낳고 쓴 21년 10월 일기의 한 구절이란 사실도 그렇게 확인됐다.

결혼 직후인 1920년 7월 스코트-젤다 피츠제럴드 부부(위 사진, Princeton Library Archives)와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그들(캐리 멀리건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AP)

결혼 직후인 1920년 7월 스코트-젤다 피츠제럴드 부부(위 사진, Princeton Library Archives)와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그들(캐리 멀리건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AP)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쯤으로 경시하는 풍조를 경계한 책 '우울증에 반대한다'를 쓴 미국 브라운대 정신의학자 피터 크레이머가 1996년 말, 스코트가 젤다의 정신과 의사에게 쓴 편지들을 근거로 젤다의 증상을 '조울증'으로 진단하는 비평적 칼럼을 썼다.
그 무렵 브라운대 방문교수로 있던 토론토대 심리학자 폴라 캐플런(Paula Caplan)이 그 칼럼을 비판했다. 한 인터뷰에서 캐플런은 "인용된 편지들만 봐도 그들(스코트와 의사)이 젤다를 얼마나 미숙한 존재로 여기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재능 있는 여성이 그런 경멸적인 취급을 꾸준히 당하면서 절망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만일 남편이 당신 작품을 훔쳐 발표해 찬사를 받는다면, 당신이 한편 절망하면서 한편으론 우쭐해지지 않겠는가. 또 만일 당신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남편의 비열함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당위 사이에서 갈등해야 한다면, 미칠 지경에 빠지지 않겠는가. 그를 정신병자라고 규정하는 건 희생자 비난(victim-blaming)이고, 정서적 고통의 원인을 모두 덮어버리는 행위일 것이다."

"재능있는 여성이 그런 경멸적인 취급을 꾸준히 당하면서 절망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놀라운 일일 것(...) 그를 정신병자라 규정하는 것은 희생자 비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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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 캐플런은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으로 상징되는 미국정신의학협회(APA)와 임상심리학계의 '비과학적 권위'와 '정신장애 진단 인플레이션'을 끊임없이 비판하며, 과도하고 때로는 부당한 정신장애(mental disorder) 진단으로 일상과 존엄을 위협 당하는 수많은 '젤다'들을 변호해온 임상심리학자다. 가정폭력과 가부장권력을 참고 견디는 여성들에게 일부 심리학계가 가한 '마조히스트(masochist, 피학성애자)'라는 낙인, 중증 월경전증후군(PMS)을 겪는 여성들이 받게 되는 '월경전불쾌감장애(PMDD)'라는 진단, 사회구조적 억압을 상대화함으로써 증상을 심리-생리적 장애의 문제, 즉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신경성식욕부진증(거식증)과 대식증(폭식증) 진단 관행…. 현대사회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분야로 심리학을, 가장 과소평가된 것으로 페미니즘을 꼽았던 페미니스트 심리학자 폴라 캐플런이 7월 21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정신질환자 인권단체(PsychRights) 설립자인 변호사 짐 고트스타인은 "폴라 캐플런은 잘못됐다고 판단한 문제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그래서 어떤 이들을 불편하게 했지만, 나는 그가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가 없다"고 애도했다.madinamerica.com

정신질환자 인권단체(PsychRights) 설립자인 변호사 짐 고트스타인은 "폴라 캐플런은 잘못됐다고 판단한 문제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그래서 어떤 이들을 불편하게 했지만, 나는 그가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가 없다"고 애도했다.madinamerica.com

폴라 조앤 캐플런은 1947년 미국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의 부동산업자 아버지와 임상심리학자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다. 하버드 래드클리프 칼리지 영문학과 학부시절 저널리스트를 꿈꾸던 그는 전원 남학생이던 학보사(The Harvard Crimson) 편집진에게 퇴짜맞는 젠더 차별을 처음 경험했다고 한다. 그는 "소설 속 허구의 인물보다 실제 사람의 마음에 더 끌려" 듀크대 대학원 심리학과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74년 결혼해 남편 직장을 따라 캐나다로 이주해 1남1녀를 낳은 뒤 78년 이혼했고, 토론토대 교수(79~95)로 재직하며 미국 브라운대와 하버드대 등서 강의했다.

1984년, 만 37세의 캐플런은 미국심리학회지에 '여성 마조히즘의 신화(The Myth of Women's Masochism)'란 제목의 도발적 논문으로 북미 심리학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1924년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론화하고 헬렌 도이치(Helene Deutsch) 등이 다듬은 '여성의 피학적 본성', 즉 여성이 가정폭력 등 학대를 겪으면서도 현실에 머물며 헌신적으로 희생하는 것은 여성의 생래적 성향 때문이라는 해석을 반박하며, 여성은 쾌락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고통, 예컨대 배우자의 보복이나 사회적 고립, 경제적 빈곤이 두려워서 견디는 것이며, 자신의 욕망보다 가족의 욕구를 우선하는 것도 강요된 모성 역할과 사회적 기대 때문이라고 썼다. 이듬해 같은 제목으로 단행본을 낸 뒤 인터뷰에서 그는 "여성의 불행의 원인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보다 그들을 마조히스트로 낙인 찍는 게 훨씬 쉬운 해법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내재된 '악(결함)'때문이라는 왜곡"이 그렇게 시작됐다고, "만일 남성이 그렇게 행동했다면, 희생적이고 용감하고 근면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 했다.
그가 논문을 발표한 84년 그해, '달콤한 고통: 희생자로서의 여성(Sweet Suffering: Woman as Victim'이란 책을 출간한 심리학자 나탈리 셰이니스(Natalie Shainess)가 "피학적 문제를 겪는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은 건 임상 경험상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반박했고, 캐플런은 "그게 현실이란 건 나도 동의한다. 다만 그 원인이 마조히즘은 아니다"라고 재반박했다.

월경전증후군(PMS)이란 용어는 영국 부인과 의사겸 내분비학자 카타리나 달턴(Katharina Dalton)과 레이먼드 그린(Raymond Greene)이 1953년 영국의학저널에 발표한 논문에 처음 썼다. 달턴 등은 당시 대다수 남성 의학자들이 가임기 여성의 정신(심리)적 결함 탓으로 여기던 그 증상이 프로게스테론 등 여성호르몬의 주기적 변동으로 인한, 자연적 생리학적 현상임을 처음 규명했다. 달턴은 가임기 여성 최소 30%가 일상에 지장을 받을 만큼 심한 PMS를 겪으며 그 중 약 1%는 범죄-폭력적 성향을 띠기도 한다고, 여성 범죄의 약 절반이 PMS 기간에 발생한다고 썼다.

중증 PMS가 '월경전불쾌감장애(PMDD, Premenstrual dysphoric disorder)'란 명칭의 정신질환으로 87년 'DSM-Ⅲ 개정판' 부록에 처음 등재됐다. 본문이 아니라 부록에 실린 건, 추가 연구 및 임상 데이터의 축적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앨런 프랜시스가 편집 책임을 맡은 'DSM-Ⅳ(94년 출간)'의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가 PMDD였다. 편집위원이던 캐플런은 구체적-의학적 기준 없이 생리적 현상에서 비롯된 심리적 문제를 질병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일 PMDD가 질병이라면,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상대적으로 많이 분비되는 남성들을 위해 '망상적지배성향장애(Delusional Dominating Personality Disorder)'란 항목도 신설해야 한다고, 항변조로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동조자는 소수였고, 그는 편집위원직을 사퇴했다.

"캐플런은 패미니즘 2세대 물결의 가장 도드라진 심리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심리학의 정직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뉴저지공대 심리학자 줄리 앤시스(오른쪽) 트위터@DrJulieAncis

"캐플런은 패미니즘 2세대 물결의 가장 도드라진 심리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심리학의 정직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뉴저지공대 심리학자 줄리 앤시스(오른쪽) 트위터@DrJulieAncis

1917년 59개에 불과하던 APA 정신장애 진단 항목은 52년 DSM-Ⅰ판에서 106개로 늘었고, 68년 Ⅱ판에서는 182개, 75년 Ⅲ판에서는 265개, 87년의 Ⅲ판 개정판에서는 292개가 됐다. 프랜시스는 Ⅳ판 편집을 끝낸 직후 인터뷰에서 "최대한 보수적으로" 신규 항목을 검증했다고 밝혔다. DSM Ⅳ판에는 신설 항목으로 제안된 100여개 중 8개만 추가됐고, PMDD는 부록에 그대로 남았다. 프랜시스는 가임기 여성 3~5%가 PMDD 증상을 겪는다며 "그들의 정서적-육체적 고통에 대한 연구를 가속화하고, 그들에게 정신의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캐플런은 "미국 여성 최소 50만 명이 PMDD 진단을 받게 됐다"며 "질병 진단-처방을 받게 될 환자에 대한 배려 없이 희박한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DSM 항목을 결정하는 것에 깊이 실망했다"고 말했다. DSM-5 발간이 예정돼 있던 2012년 캐플런은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APA는 환자의 이해를 최우선으로 삼는 기관이 아니라 회원을 위한 이익집단일 뿐"이며 "그들은 DSM-Ⅳ 판매로 약 1억 달러를 벌었다"고 썼다. 새로운 진단 질병이 생길 때마다 '환자가 만들어지고', 약품 소비와 보험금 등 부담이 늘고, 약물 등 공격적인 치료로 인한 부작용 등 개인과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도 늘어난다. 그는 "DSM-4에 등재된 정신장애 항목은 374개다. 만일 당신이 2주 전 가까운 사람과 사별한 뒤 지금도 슬픔에 잠겨 있다면 '주요우울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 진단을 받을 수 있고, 또 당신이 활발한 성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서 풍부한 성적 판타지를 갖고 있다면 '저활동성 성욕장애(Hypoactive Sexual Desire Disorder)' 진단을 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미국인 약 절반이 평생 최소 한 번 정신과 진단을 받는다"고 말했다.

앨런 프랜시스도 2010년 LA타임스 칼럼에서 DSM의 과학성을 옹호하면서도 "우리의 그물이 지나치게 넓은 것도 사실"이라며 과잉 진단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는 주의력결핍장애나 자폐증, 어린이양극성장애 등 DSM-Ⅳ의 느슨한 진단 기준 때문에 "정신의학 시스템에 들지 않았으면 훨씬 나았을 수 있는 많은 이들을 '환자'로 만들었다"고 썼다. 그는 2013년 '한 정신의학자의 정신병 산업에 대한 경고'라는 부제를 단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Saving Normal)'이란 책을 출간, 캐플런보다는 온건하지만 캐플런 못지않은 곡진한 어조로, '진단 인플레이션'의 실태와 문제점을 스스로 폭로했다.

캐플런은 참전군인들이 겪는 정서적-정신적 고통을 국가와 사회가 'PTSD'라는 정신질환의 문제로 병리화하는 베테랑 개인뿐 아니라 국가에도 커다른 해악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위키미디어.

캐플런은 참전군인들이 겪는 정서적-정신적 고통을 국가와 사회가 'PTSD'라는 정신질환의 문제로 병리화하는 베테랑 개인뿐 아니라 국가에도 커다른 해악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위키미디어.

만년의 캐플런은 비일상적인 상황에 대한 일반적-정상적 반응으로서의 정서적 변화를 두고 광범위하게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진단하는 관행을 격렬히 반박했다. 전우의 몸이 찢기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비겁하게 숨고, 자기가 쏜 총에 무고한 아이가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병사는 당시의 공포와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혹은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끝내 이해 받지 못하리란 판단 때문에, 혼자 침묵하며 고통을 견디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전쟁의 야만에 상처받고, 전역 후 고립감 속에 영혼을 잠식당하고, 나약함의 낙인 같은 PTSD 진단에 주눅들고, 더러는 자살로 생을 맺기도 한다. 이라크 전쟁 참전 군인 자살률은 10만 명 당 17.3명으로, 걸프전보다 5배, 베트남전쟁보다 11% 많았다. 캐플런은 지난해 10월 'Mad in America' 칼럼에서 "정말 정신의학적 치료가 효과적이라면 왜 자살률은 점점 높아지고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국가와 공동체가 PTSD 진단으로 참전 군인들을 의료서비스의 영역으로 내몰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도록 어깨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그들이 미친 게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과 반응을 보이는 것임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4년 한 의학저널 조사에 따르면 PTSD 진단을 받은 베테랑 38%는 의료진을 불신했고, 50%는 진단으로 인한 불이익을 염려했고, 65%는 약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두려워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많은 시민이 PTSD 증상을 겪는다는,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한 최근 보도에도 그는 "정체를 완벽히 알지 못하는, 위험한 전염병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시민들이 충격과 불안에 휩싸이는 걸 정말 정신의학적 질병이라고 생각하느냐"고 꼬집기도 했다.

정신의학 특성상 정상과 이상, 비장애와 장애를 나눌 수 있는 확정적 기준은 없다. 그 모호함에서 정신의학 판타지가 발아하고 번식한다. 정신의학 만능과 정신의학 불신이라는 극단의 판타지다. 폴라 캐플런(과 앨런 프랜시스)은 정신장애 진단-치료의 기능과 가치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라 느슨한 진단 기준의 부작용, 즉 만능의 판타지를 고발하고 비판했다. 그들의 무대가 정신병원의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북미지역이라는 점도 고려돼야 할 것이다. 공과를 떠나 그(들)의 부단한 고발은 '정신의학의 바이블'이라 불리던 DSM을 임상 진단 참고용 지침서 정도로 자리잡게 하는 데 기여했다.

캐플런은 10여권(공저 포함)의 책을 썼고, 한 매체는 그의 저서들을 20세기 정신의학의 '게임체인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썼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책은 없다. amazon.com

캐플런은 10여권(공저 포함)의 책을 썼고, 한 매체는 그의 저서들을 20세기 정신의학의 '게임체인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썼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책은 없다. amazon.com

캐플런은 '여성 마조히즘의 신화' 이래 총 11권의 책을 썼다. '어머니를 비난하지 마라(89)', '육중한 깃털들 걷어내기: 여성이 아카데미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1993)', '성과 젠더 연구에 대한 비판적 사고(94)', '그들은 당신을 미쳤다고 말한다: 권위있는 정신의학자들이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는 법(95)'…. 그의 마지막 책은 '조니와 제인이 제대해 귀향할 때: 어떻게 베테랑들을 도울수 있을까'였다. 그는 낙인-차별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희곡과 시나리오를 썼고, 2편의 단편 다큐멘터리도 제작했다. 'Mad in America'는 그의 부고에서 캐플런(의 일련의 저서들)을 "정신의학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존재(game-changer)"였다고 평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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