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여성의 손이 보여주는 것

입력
2021.09.30 15:30
19면

유리 작가 그림책 '앙코르'

편집자주

그림책은 ‘마음 백신’입니다. ‘함께 본다, 그림책’은 여백 속 이야기를 통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보듬어 줄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어린이책 기획자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이기도 한 신수진 번역가가 <한국일보> 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그림책 '앙코르'의 낡은 바이올린은 현악기 제작자의 손에서 새로 태어나 새 연주자의 손에 들린다. 이야기꽃 제공

그림책 '앙코르'의 낡은 바이올린은 현악기 제작자의 손에서 새로 태어나 새 연주자의 손에 들린다. 이야기꽃 제공

부서지고 버려진 것들이 빛나는 쓸모를 다시 찾는 이야기는 어린이책에서 즐겨 다뤄 온 주제 중 하나다. 그런데 유리 작가의 그림책 '앙코르'(이야기꽃 발행)는 버려졌던 악기가 새 생명을 얻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악기를 통해 누군가 생각지도 못했던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되는 이야기로 나아간다.

낡은 바이올린 가방이 폐기물 스티커가 붙은 채 길거리에 놓여 있다. 너덜너덜 현이 풀리고 먼지를 뒤집어쓴 바이올린을 누군가 조용히 자전거에 싣고 간다. 곧이어 자잘한 도구들로 가득한 현악기 제작 공방에 딸깍 불이 켜지고, 버려졌던 바이올린은 현악기 제작자의 손길로 구석구석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정성껏 수리된 바이올린은 꿈을 포기하고 살아 왔던 한 연주자의 손에 들리고, 마침내 어느 겨울날 작은 무대에서는 "앙코르!"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여성 바이올린 제작자를 찾아 3년간이나 취재하면서 쓰고 그렸다는 이 책에서 유리 작가는 악기 못지않게 사람의 손에도 집중한다. 책장을 넘기면서 우리는 바이올린이 얼마나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섬세한 악기인지, 사람이 양손의 감각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판단하고 창조해낼 수 있는지를 눈으로 실감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여성 바이올린 제작자의 손은 굳은살 박인 손마디와 불끈 힘을 준 근육이 돋보이는 '일하는 손'이다. 그동안 노동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나이 든 남성의 주름지고 투박한 손이었고, 일하는 여성들의 존재와 다양한 직업의 현장이 그림책에 등장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희고 가느다란 '섬섬옥수'가 아니라 씩씩하게 자신의 일을 해내는 건강한 여성의 손이 이 책을 시종일관 관통하는 이미지다.

바이올린과 더불어 '일하는 여성'의 손은 그림책 '앙코르'의 주인공이다. 이야기꽃 제공

바이올린과 더불어 '일하는 여성'의 손은 그림책 '앙코르'의 주인공이다. 이야기꽃 제공

손은 인체 부위 중에서도 가장 그리기 어려운 곳으로 꼽힌다. 해부학적 구조를 잘 알아야 하고, 한 근육이 다른 근육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그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관찰과 연습이 필요하다. 일반인 대상의 그림책 만들기 수업에서 '손발을 대충 그리거나 안 그리고 인물 표현하는 법' 같은 강의를 마련한 적도 있을 정도다. 손은 얼굴 표정 못지않게 감정 표현의 중요한 요소다. 누군가를 위해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낡은 바이올린을 수리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주인공이 말끔하게 윤이 나는 바이올린을 들고 찾아간 곳은 동네 슈퍼마켓이다. 채소 상자를 들어올리고 새로운 물건을 정리하기 바쁘던 또 다른 여성이 뜻밖의 방문에 깜짝 놀라는 모습이다. 바이올린 가방을 받아 든 여성은 앞치마를 두른 채 곧바로 바이올린을 켜본다. 이 장면에서도 표정보다는 손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연주자로 살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일하면서 꿈을 지켜왔을 긴 시간을 가늠하게 해주는 손이다.

그림책 '앙코르'는 버려진 바이올린이 다시 쓸모를 찾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꽃 제공

그림책 '앙코르'는 버려진 바이올린이 다시 쓸모를 찾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꽃 제공

책 제목인 '앙코르'는 연주자에게 보내는 관객들의 환호성이기도 하고, 못다 이룬 꿈을 향한 두 번째 도전을 응원하는 뜻을 담은 말이기도 하다. 그림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해 온 여성들은 흔히 화목한 가정의 좋은 양육자이거나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인정받는 모습으로만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면서도 예술적 열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생활 예술가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는 그러한 사람들을 대변하고 응원하는 새로운 여성 주인공이다. 커다란 무대가 아니어도, 전업 연주자가 아니어도 예술로 주위를 풍요롭게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부터 힘껏 박수를 보낸다.

그나저나 바이올린 제작자와 연주자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일까. 그림책에서는 본문에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내용을 앞면지와 뒷면지에 담는 경우가 많다. 면지는 책표지와 본문을 연결해주는 부분으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같은 역할을 한다. 오랜 세월이 담긴 두 사람의 사진을 앞뒤 면지에서 각각 확인하고 나면 이 책을 더 애틋한 마음으로 맨 앞장부터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림책을 볼 때는 앞표지부터 면지, 뒤표지까지 모든 요소를 놓치지 말고 꼼꼼히 살펴보시기를!

앙코르·유리 글·그림·이야기꽃 발행·84쪽·2만5,000원

앙코르·유리 글·그림·이야기꽃 발행·84쪽·2만5,000원


신수진 어린이책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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