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심심하고 삼삼하게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요즘 바깥나들이가 쉽지 않다. 지인 여럿과 한 곳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소식을 들을 때가 그리운 형편이다. 이처럼 ‘바깥소식이 많이 궁금하다’고 할 때 ‘궁금하다’란 알고 싶어 몹시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이른다. 그런데 궁금한 마음처럼 궁금한 속도 있다. 배가 출출하여 무엇이 먹고 싶을 때도 우리말로는 ‘궁금하다’이다. ‘입이 궁금하다’와 같이 쓰는데, 궁금함이란 결국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판도라 상자의 열쇠가 인간의 호기심이었으니 말이다. 궁금할 때 사람은 깊이 생각하며 진리를 따져 본다. 그것이 ‘연구’이다. 일이 잘 안 풀려 울상 짓는 아이에게 ‘잘 연구해 봐’라고 조언한다. 이런 말의 쓰임을 보니, 연구는 공부방이나 실험실의 책상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사하고 캐고 파고드는 우리의 모든 일상이 곧 연구가 아닌지?
우리 삶에 연구와 궁리가 없다면 과연 어떠할까?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심심하다’가 떠오른다. 흥미롭게도 이 말이 전혀 다른 상황에서 쓰인다. 종종 ‘심심한 감사, 심심한 조의’로 표현할 때 이 말을 쓰는데, 여기서 쓰인 ‘심심하다’는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말이다. 한편 ‘심심하다’는 ‘국물을 심심하게 끓였다’처럼 음식 맛이 조금 싱겁다 할 때도 쓴다. 싱거운 맛이라 하기 싫은가? 그러면 조금 삼삼하다고 해 보자. ‘삼삼하다’는 조금 싱거운 듯하면서 맛이 있다는 말이다. ‘국물이 삼삼하다’와 같이 맛에 끌리는 느낌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삼삼하다’는 사물이나 사람 생김새에 마음이 끌릴 때도 쓴다. 잊히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듯 또렷한 무언가 또는 누군가가 그려진다. ‘불의를 참지 않고 좋은 일이라면 먼저 나서던 그 성격’을 가진, 눈앞에 삼삼한 누군가가 자기 벗이라면 참으로 행운이 아닌가?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말을 알아야 할까? 언어별로 다르겠지만,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말 6,000개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그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말 절반 정도만 반복적으로 쓰고 만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음도 속도 ‘궁금’할 때라면 우리말을 더 ‘연구’해 보자. 만약 말에도 머리카락 같은 숱이 있다면 말을 편식하지 않을 때 더 풍성해지고 윤기도 나지 않을까? 오히려 궁금하게 하고 연구해 볼 우리말이 다채롭게 있다는 사실에 심심하게 감사를 표한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