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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자 물길에 섬이 72개... 어디가 실제이고 어디가 반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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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회하(淮河)와 진령(秦嶺) 남쪽을 강남이라 했다. 회화보다 아래 위치한 장강 이남에 강남 수향이 많다. 쑤저우 왼쪽에는 3대 담수호인 태호(太湖)가 있다. 안후이에서 발원한 전당강(錢塘江)은 항저우를 거쳐 바다로 흐른다. 이런 자연환경이 쑤저우와 항저우 사이에 천년고진이자 수향(水?)을 수없이 많이 만들었다. 물과 함께 살아온 마을마다 개성 강한 역사 문화, 풍광만큼이나 아름다운 이야기도 남겼다. 6대 수향이라 일컫는 루즈, 퉁리, 저우좡, 난쉰, 시탕, 우전으로 발품 기행을 떠난다. 모두 4편으로 나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도처의 신기한 동물을 모아 금수원(禽獸園)을 지었다. 어느 날 황제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동물을 보고 싶어 했다. 결국 고민 끝에 이종 교배를 단행했다. 몇 년 후 야생 소가 암수 한 쌍을 잉태했다. 코뿔소의 뿔, 사자의 몸, 용의 등, 곰의 손, 물고기의 비늘, 소의 꼬리를 지녔다. 뿔이 하나여서 단정하다는 뜻으로 각단(角端)이라 이름을 짓고 보고를 했다.
크게 기뻐한 황제가 7획의 각에서 뿔 하나를 뗐다. 6획의 녹(?)이 됐다. 신화 속 동물 녹단이 탄생했다. '오로지 하나의 마음으로 불편부당하지 않게 통치한다'는 상징으로 발전했다. 고궁 중화전 보좌 옆에 녹단 한 쌍이 앉아 있다. 황제 거처에 자주 등단한다. 역대 황실의 애완용이었다.
녹단의 전설이 있는 수향이 있다. 쑤저우 우장구에 위치한 루즈(?直), 한자어로 녹직이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실시한 군현제 당시 오현(吳縣)에 속했다. 오나라 땅이라는 흔적이다. 입구 광장에 들어서니 뿔 하나가 정수리에 솟구친 녹단 조각상이 있다. 중원의 신화가 왜 장강 남쪽까지 왔을까? 하루에 1만 8,000리를 날고 온 사방의 언어를 알아듣고 명군(明君)을 수행한다. 아무리 국태민안(國泰民安)과 부유(富裕)를 염원해도 누가 감히 황제의 물건에 손을 댔다는 말인가?
6대 수향 중 가장 자그마하다. 꾸미지 않아 화려하지 않고, 오가는 사람도 많지 않아 오히려 평화롭다. 10m 너비 될까 말까 한 도랑을 따라 들어가면 양쪽을 오가는 돌다리가 많다. 관광지가 됐으니 가옥은 대부분 가게로 변했다. 지붕이나 담장 골격은 그대로 남았다. 어린이 하나가 나무 의자에 예쁘게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기와도 빼곡하고 늘어진 나무줄기도 보인다. 난간 위 화분 몇 개도 빼지 않았다. 실제로는 건물에 화분은 보이지 않는다. 수향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거나 창작이라 생각하니 문득 기분이 좋다. 그림이 베끼는 예술은 아니니까.
루즈는 오호지정(五湖之汀)과 육택지충(六澤之衝)이라 한다. 지도를 보니 딱 어울린다. 호수와 강이 만든 습지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기원전부터 사람이 살던 마을이었다.
12세기 남송 시대에 태호의 범람이 심각했다. 수면이 상승하고 엄청난 홍수가 여러 차례 몰려왔다. 태호 주변의 마을이 초토화됐다. 그런데 오직 루즈만이 수해를 당하지 않았기에 수마를 막은 신수(神獸)가 있다고 믿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신화가 준 선물일까? 진시황의 녹단은 심야에 문을 부수고 도망쳤다. 남방으로 날아가던 녹단이 ‘보리(甫里)의 징호(澄湖)’에 거처를 정했다는 전설이 이어진다. 루즈의 옛 지명이 보리다. 그 남쪽에 징호가 있다.
지명에 비밀이 있다. 신화에서 과학으로 넘어간다. 명나라 시대에는 육직(六直)이라 불렀다. 수천 년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토양 덕분이다. 강이 범람하며 함께 쓸려온 진흙이 차곡차곡 퇴적된 땅이다. 지질 용어로 선상지(扇狀地) 또는 충적산(沖積扇)이라 한다. 운반된 흙이 부채 모양으로 퇴적해 이뤄진 지형을 말한다. 선상지는 대체로 지대가 높고 토양도 곡창을 이룰 정도로 양호하다. 당연히 거주지로 유리하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3개의 강이 나란히 직렬로 흐르고 있다. 게다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다른 지방보다 도랑을 따라 물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빠르다. 남북으로 흐르는 강도 3개가 있다. 홍수가 나도 배수가 확실하다. 하늘에서 보면 용(用) 자처럼 보인다고 한다. 6개의 강이 가로와 세로로 직류(直流)하기 때문이다. 정말 복 받은 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나라 시대 이미 홍수를 경험하고 지질학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민국 시대인 1912년 용 자 위에 점 하나를 더 찍었다. 녹단과 직류가 만났다. 신화와 과학의 절묘한 조합으로 이룬 수향이 됐다.
도랑을 찰랑거리며 여러 척의 배가 오고 있다. 뱃전에 붉은 꽃술을 묶은 혼례 배다. 예물을 실은 배에 뒤이어 악기 소리가 요란하다. 예전에는 물길을 따라 이동했다. 가마 대신에 꽃을 두른 배를 타고 시집가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복을 가득 싣고 떠나는 신부가 떠오른다. 물길 따라 천생연분과 백년해로를 품에 넣고 가는 길이다. 좁고 잔잔한 도랑 위를 살포시 넘실거리는 유람이다. 두근두근 콩닥거리는 가슴처럼 나지막하게 흔들리는 배가 다리 아래로 사라진다. 포근한 날씨에 흘린 땀을 살짝 닦는데 반대쪽에서 배가 다시 나타났다가 조용해진다. 도랑에 떨어진 나뭇잎을 청소 배가 지나며 쓸어 담는다.
마을 북쪽에 삼원교(三元橋)와 만안교(萬安橋)가 있다. 물이 갈라지니 엇갈려 다리 두 개를 만들었다. 삼보 거리라고 삼보양교(三步兩橋)라 부른다.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다. 잘 어울리는 쌍교(雙橋)다.
수향은 그야말로 돌다리의 연속이다. 골목마다 놓였고 쌍교도 많은 편이다. 골목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다리다. 빙 둘러 가지 않고 바로 넘도록 만든 다리는 기나긴 세월이 만든 흔적이다. 한적한 수향의 야경을 느끼며 푹 머무르기 위해 다시 꼭 오고 싶다. 남쪽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수향으로 간다.
수향은 항저우와 쑤저우 사이를 촉촉하게 적시는 수분만큼이나 많다. 6대 수향은 널리 이름이 알려져 사람이 많이 찾는다. 장쑤성에 셋, 저장성에 셋으로 정답게 반반 나눴다.
수로로 이용하는 도랑 위에 아치형 돌다리인 석공교(石拱橋)가 놓였고, 그 아래로 오봉선(烏?船)이 떠다닌다. 마두장(馬頭牆)과 분장대와(粉牆黛瓦)는 휘주 고촌의 영향을 받았다. 물과 어우러지면 더욱더 낭만이 물씬 묻어난다. 강남에 내리는 비와 어울리는 유지산(油紙傘), 꽃무늬 염색이 아름다운 남인화포(藍印花布)는 수향만의 개성이다. 쑤저우에 위치한 6대 수향 퉁리(同里)로 간다.
퉁리는 태호와 가깝다. 지그재그로 흐르는 도랑을 따라 크고 작은 섬이 무려 72개다. 다리도 49개나 된다. 다리만 건너도 하루가 다 지날지 모른다. 입구도 여덟 군데다. 북이문(北二門)으로 들어간다. 한결 푸릇푸릇한 도랑이 나오고 소담한 가게가 나타난다. 그 많은 다리마다 이름을 붙인 이유가 분명 있을 듯하다. 득춘교(得春橋)를 지나 왼쪽 골목으로 150m 직진한다. 예약한 화젠탕(花間堂)에 짐을 푼다. 유명 관광지마다 지점을 늘려가고 있는 고급 객잔이다. 오래된 공간을 인수한 후 리모델링해 5성급 호텔 수준의 숙박시설로 운영한다.
20세기 초 여성 전문학교인 여칙여학(麗則女學)을 개조했다. 일제강점기에 강탈 당해 군영으로 사용됐다. 건국 후 초등학교로 이용됐다. 옛 교육기관으로의 가치도 여전하고 고풍스럽기도 하다. 성급 문물로 보호할 만큼 인상적인 유적지다. 바로 옆 부대시설을 개조해 깔끔하게 꾸몄다. 중국은 갈수록 여행하기 좋은 천하로 급변하고 있다. 천년 고진의 감성을 살린 채 여행자의 구미에 맞게 꾸몄으니 일석이조다. 하루 숙박 요금이 결코 저렴하지 않다. 그래도 제주도 고급 펜션보다는 싸다.
재미난 풍습이 있는 다리로 간다. 돌다리 셋을 모두 건너는 주삼교(走三橋)다. 세 갈래 도랑에 돌다리 셋이 삼각형을 그리고 있다. 태평교(太平橋), 길리교(吉利橋), 장경교(長慶橋)다. 모두 인생의 덕담으로 지은 이름이다. 신랑 신부는 행복한 가정을 위해 혼례 후 차례로 건넌다. 시탕(喜糖)을 나눠주며 축복을 기원한다. 정월 대보름인 원소절 밤에 건너면 어린이는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게 된다. 아픈 사람은 만병이 사라진다. 젊은이는 사업이 번창하며 노인은 혈색이 돌아 늙지 않는다. 모두 속담으로 전해온다. 퉁리에 와서 이런 다리를 건너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장경교 위에 오르면 왼쪽에 길리교, 정면이 태평교다. 차례로 세 다리를 건너는데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삼교 사이 도랑에서 뱃사공이 가마우지로 낚시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세어보니 일곱 마리다. 가마우지는 주인을 위해 물고기를 낚아챈다. 목에 걸려 곧바로 삼키지 못하는 운명이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적절한 보상이 따른다. 낚시를 끝낸 주인이 귀가한다. 뒤따라 가니 어행교(魚行橋)다. 다리 아래에서 뒤돌아보니 약 100m 떨어진 길리교까지 시야가 한꺼번에 보인다. 도랑에 비친 풍광을 보니 마치 나무가 물밑으로 뿌리를 뻗어 내린 듯하다. 물이 하도 선명하고 심도가 깊어 어디부터 반영인지 분간이 어렵다. 거꾸로 봐도 나무는 한치도 흔들리지 않고 하늘로 치솟은 듯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퉁리의 옛 지명은 부토(富土)였다. 마을 이름이 바뀐 사연이 절묘하다. 수나라 양제가 통치하던 시대다. 전국에 재난이 발생해 국고가 바닥났다.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창고가 비자 황제는 ‘모든 강남 지역 부토의 집마다 세 말의 곡식을 바치라’는 어명을 내렸다. 소식이 전해지자 순식간에 원망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잘 사는 땅'에서 곡식을 차출하라는 뜻이었으나, 공교롭게도 특정 지명인 부토 마을을 지칭한 것처럼 돼 버렸다. 황제의 성지에도 들어갔으니 빼도 박도 못할 지경이었다. 마침 수해로 흉년이 들어 먹고 죽을 곡식 한 톨이 없는 상황이었다. 피할 도리 없이 발을 동동 구를 뿐 막막했다.
이때 한 서생이 개명(改名)의 계책을 내놓았다. 글자를 뜯어 해체하는 아이디어였다. 우선 부(富)에서 지붕(?)의 꼭지점을 떼어버렸다. 민갓머리 멱(?)의 양끝을 아래로 길게 늘이고 일(一)과 구(口)를 합해 동(同)을 만들었다. 부에서 남은 전(田)과 토(土)를 위아래로 합체하니 리(里)가 됐다. 한순간에 부토가 퉁리(同里)로 변했다. 독촉하려 온 최량관(催糧官)도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갔다고 구전되고 있다. 가족을 살리고자 했던 기발한 지혜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도시로 나간 젊은이도 결혼할 때면 고향으로 돌아와 반드시 다리 셋을 건너는 이유다.
태래교(泰來橋)가 보인다. 명나라 말기에 나무다리로 세웠다가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돌다리로 보수했다. 1983년 들보 하나가 떨어졌다. 2003년에 다시 나머지 들보가 추락하면서 다리가 무너졌다. 새로 보수하면서 옛 돌과 섞여 상처투성이가 됐다. 대로에서 들어오는 초입에 위치하는 다리다. 퉁리에서 가장 높은 4.35m에 이른다. 다리 위에 비를 막는 탑을 세웠다. 도랑에도 반영돼 독특한 풍광을 연출한다. 돌다리 많은 수향에서 매우 보기 드문 모양이다. 퉁리 입장권에도 등장한다. 일종의 랜드마크다.
한가하고 촉촉한 골목을 거닐면 곳곳에 숨은 저택과 만나게 된다. 퇴사원(退思園)이 가장 유명하다. 청나라 광서제 시대 고관인 임란생이 퇴임 후 건축했다. 태평천국 봉기와 비슷한 시기 사염(私鹽) 조직인 염군의 민란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고,대규모 치수 공사에 소질을 발휘한 전문가였다.
안후이 일대를 총괄하는 벼슬인 병비도(兵備道)로 재임했을 때다. 정적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서태후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그를 구명하기 위해 군기대신 좌종당과 병부상서 팽옥린이 나섰다. 어떤 죄상을 이야기하더라도 오로지 ‘그렇습니다’만 반복하라 강권했다. 태후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으냐?’ 묻거든 ‘진사진충(進思盡忠), 퇴사보과(退思補過)’로 대답하라 충고했다. 춘추시대 좌구명이 지은 ‘좌씨춘추’가 출처다. ‘관직에 나갈 때는 충성으로 군주를 받들고, 사직 후 은거할 때는 자신을 반성한다’는 말이다.
충실히 대답했다. 구차한 변명 없이 공손한 태도로 서태후의 심기를 안정시켰다. 두 우군의 측면 지원도 한 몫 했지만, ‘충성’과 ‘반성’을 언급한 덕분에 멸문지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관직을 내려놓고 귀향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생활하거나 누명에 대해 불평하다가 참형을 받은 역사는 다반사였다. 서한의 양운은 퇴직 후 사업을 벌이고 빈객을 모으다가 허리가 잘리는 요참(腰斬)을 당하지 않았던가? 임란생은 저택을 짓고 퇴사원이라 불렀다. 팽옥린은 여전히 걱정이 태산이었다. ‘대나무 심고 물고기 기르며 사는 안락한 생활을 본받고, 책 읽고 베 짜며 상서로운 소리를 내라’는 의미의 ‘종죽양어안락법(種竹養魚安樂法), 독서직포길상성(讀書織布吉祥聲)’ 대련을 보냈다. 여생의 교훈으로 참 좋은 말이었다.
2년 후 황하의 제방이 무너지자 홍수에 대처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퇴사 후 반성이나 뜻밖의 복귀도 하늘의 뜻이 아니던가? 공무를 시작하고 얼마 후 말에서 떨어져 후유증으로 별세했다. 퇴사원의 여유는 그의 사치였던 셈이다.
서서히 어둠이 몰려든다. 유지산 가게가 보여 들어선다. 조명에 투명하게 드러난 우산 빛깔이 볼수록 예쁘다. 몸 하나를 가리는 우산이다. 홍수로부터 세상 사람을 모두 가리려다가 목숨을 잃은 퇴사원 주인이 자꾸 뇌리에 맴돈다. 물러나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여생을 보내는 교훈이 흘러간 역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공직에서 나와 정치판에 고개를 내밀다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일이 부지기수다.
식당에 불빛이 켜지니 도랑도 조금 밝아진다. 수향은 풍광도 아름답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숨겨두고 있다. 지난 역사의 한 대목으로만 남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지침이 되기도 한다. 술 한 모금 입술에 묻힌다. 비처럼 목구멍으로 붓더라도 취기가 오르지 않을 듯하다. 물기 머금은 솜처럼 숙취로 무거워지더라도 수향의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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