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만 되면 '며느리 지배'… 소년은 계급차를 배운다

입력
2021.09.25 04:30
12면

<37> 제사와 계급 권력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며느리가 겪는 시댁과의 갈등을 생생하게 그려 호응을 얻은 카카오TV 자체 제작 드라마 '며느라기'의 한 장면. 명절날 여자들은 작은 상에 모여 따로 밥을 먹고 있다. 카카오TV 캡처

며느리가 겪는 시댁과의 갈등을 생생하게 그려 호응을 얻은 카카오TV 자체 제작 드라마 '며느라기'의 한 장면. 명절날 여자들은 작은 상에 모여 따로 밥을 먹고 있다. 카카오TV 캡처

지난 21일은 추석이었다. 다들 평등한 명절 보내셨는지 궁금하다. 최근 뉴스 기사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제사를 없애거나 간소화했다는 사연을 많이 접하게 된다. 가족 회의 결과라고 해도, 제사를 도맡아 준비할 사람이 없게 된 것이 계기였던 경우가 많다. 어머니의 노환이라든가, 아들 부부가 이혼했다든가, 집안 여자들이 제사를 보이콧 한다든가 등등. 흥미롭다. 결국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명절 내내 일할 사람, 즉 각 집안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노동력이 없으니 제사가 없어지게 된 것 아닌가.

이상하다. 그동안 명절의 성차별 노동에 반발하는 여자들을 나쁜 며느리로 몰아가는 쪽이 내세운 논리는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고 부모님 은혜에 감사하는 미풍양속'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 아니었나. 그렇게나 제사가 중요하다면, 일할 여자가 없거나 더 이상 여자들이 일하려 하지 않더라도 남자들끼리 일해서 '미풍양속'을 계승해야 할 것 아닌가? 일 시킬 여자들이 없게 되자 제사를 없앤다는 것은, 제사의 본래 목적을 의심하게 만든다. 과연 제사의 근본 목적은 조상을 기리는 것일까? 자, 이번에는 추석 특집이다.

영국의 내부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독립전쟁 기념물. 1922년 아일랜드 공화국 수립 전까지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내부 식민 대상이었다. 위키피디아 캡처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독립전쟁 기념물. 1922년 아일랜드 공화국 수립 전까지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내부 식민 대상이었다. 위키피디아 캡처


세계사에서 제국주의 역사를 말하자면 영국이 먼저 떠오른다. 영국이 19세기에 능숙하게 식민지를 지배하고 확대하여 소위 대영제국을 건설한 배경에는 중세부터 아일랜드 등 내부 식민지를 지배해서 경험을 쌓은 역사적 사실이 있다.

아일랜드의 원주민은 켈트족이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아일랜드섬에 살기 시작했다. 1170년 헨리 2세 때부터 영국, 정확히는 잉글랜드(현대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가 합쳐진 연합 왕국인데, 이들 지역은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하나로 통합되었다)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16세기 초 헨리 8세가 아일랜드를 재침공하면서 잉글랜드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지배자들은 아일랜드의 토지를 빼앗고 식량을 수탈했다. 영국 국교를 강요하고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미신을 믿는 이교도로 여겨 멸시했다. 청교도 혁명 후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도들을 중심으로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의 저항운동이 일어나자 잉글랜드의 크롬웰은 4,000여 명에 달하는 아일랜드 주민들을 드로이다에서 학살한다.

1652년,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식민법을 만들어 아일랜드의 토지를 본격적으로 빼앗는다. 그 결과 전체 경지의 3분의 2가 잉글랜드 지주 소유가 되었다. 한편, 몰락한 아일랜드 농민은 잉글랜드인 지주의 소작인이 되었다. 곡식을 팔아 소작료를 내고 나면 가난한 아일랜드 소작농들이 먹을 것이라고는 감자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840년대 중반, 감자 마름병이 아일랜드 도처에서 발생하여 대기근이 들었다. 아일랜드 전체 인구 820만 명 중 무려 100만 명이 굶어죽었는데도 잉글랜드 지배자들은 구호하기는커녕 아일랜드 사람들이 게으르고 미개한 탓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신의 징벌이라고도 말하며 여전히 아일랜드의 밀을 수탈하여 잉글랜드로 가져갔다.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잉글랜드로 간 아일랜드 노동자들은 저임금을 받으며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감수했다. 선택의 여지란 없었기에 철도 건설 현장에서 짐승처럼 묵묵히 일했다. 대영제국의 눈부신 근대화와 산업 혁명의 공은 감자 기근으로 고향을 떠나온 아일랜드 노동자들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1922년, 아일랜드는 독립전쟁을 통해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인들은 여전히 드로이다 대학살과 감자 대기근을 잊지 않고 있다.

일본의 약탈도 내부에서 시작됐다

2003년에 찍은 아이누족의 모습.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은 1872년 일본의 홋카이도 개척이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의 약탈 대상이었다. 위키피디아 캡처

2003년에 찍은 아이누족의 모습.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은 1872년 일본의 홋카이도 개척이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의 약탈 대상이었다. 위키피디아 캡처

이번에는 일본의 예를 보자. 일본 역시 대만과 조선을 식민 지배하고 아시아 침략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아마미 군도, 오키나와, 홋카이도를 지배한 역사가 있다.

아마미 군도는 규슈의 서남쪽에 있는 작은 섬들을 말한다. 현재 가고시마현에 속한다. 아마미 군도는 13세기부터 류큐국의 일원이었다. 에도 막부 시절 사쓰마번에서는 아마미 군도를 점령하고 섬에서 재배하는 사탕수수로 만드는 흑당을 세금으로 받았다. 17세기 이래 아마미 군도에서 생산된 흑당은 오사카 시장에서 고가에 팔렸기에 사쓰마번은 아마미 군도 주민들에게 인신매매를 해서라도 할당된 흑당 세금액을 납부하도록 했다. 당시 건강한 성인 남자 한 사람은 흑당 1600근에, 여자는 1400근에 노예로 팔렸다.

쌀을 생산하던 논에도 사탕수수를 심도록 강제한 결과 식량난이 발생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소철 나무 열매로 연명할 정도였다. 아마미 군도 사람들은 지금도 그 시절을 고쿠토(흑당) 지옥으로 부른다. 한편 소테쓰(소철) 지옥이란 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쓰마번은 아마미 군도의 흑당으로 인한 수입 덕분에 부국강병을 이루어 조슈번과 함께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사쓰마번은 오키나와도 침략한다. 일본의 규슈 지역과 타이완 사이에 위치한 오키나와에는 12세기 들어 각 지역에서 세력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4세기에는 세 나라가 성립해 있었다. 그러다 15세기에 세워진 통일 왕국이 류큐국이다. 19세기 말까지 독립국이었던 류큐는 메이지 유신 후 1872년 일본 영토로 강제 편입되어 류큐번이 된다.

일본은 1879년에는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오키나와 주민의 저항은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진압했다. 류큐국의 조공을 받던 청나라가 항의했지만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오키나와를 일본 영토로 확정 지었다. 일본은 풍속 개량을 한다며 류큐 민족의 언어를 방언으로 규정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으며 이름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도록 했다. 조선을 식민 지배하며 쓰던 방식과 똑같다.

마지막으로 홋카이도의 경우를 보자. 그곳에는 원래 아이누족이 살고 있었으나 계속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고 통일된 적은 없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1872년 개척사 장관을 두고 홋카이도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다. 일본인들의 이민을 장려하여 그 결과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일본인들은 1899년 홋카이도 구토인 보호법을 제정하여 아이누를 토인으로 구분해 부르며 차별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법이 폐지 된 것은 1997년이다. 홋카이도 원주민은 무려 100년간 법적인 차별을 받았다.

명절 제삿날 목격되는 지배의 현장

여성들이 명절 때 제사 음식 만들기부터 끊임없이 일을 하는 탓에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생기기도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여성들이 명절 때 제사 음식 만들기부터 끊임없이 일을 하는 탓에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생기기도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렇게 역사를 살펴보면 제국주의 국가들은 타국을 식민 지배하기 이전에 먼저 자국 내에서 내부 식민 지배 경험을 쌓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다. 여성 차별과 폭력 역시 내부 식민 지배, 즉 가정 내 성차별을 통해 경험을 쌓고 남성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여성은 남성인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며, 남성인 나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하층 계급에 속한다. 여성을 차별하고 나쁜 여성이라면 경우에 따라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이데올로기를 습득한다. 바로 명절 때 제사 의식을 통해서다.

평소 각 가정 내에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면 명확해진다. 남자들은 거실에서 앉아서 상 받는 높으신 존재이고, 여자들은 부엌에서 일하는 하급의 존재라는 것이. 두 성별은 다른 신분에 속한다는 것이. 게다가 본인 핏줄 조상님께 상 올려 감사드리는데 일은 다른 핏줄을 가진, 시집 온 여자들이 하고 있다. 남자들은 술잔 올리고 절하는 제사장 역할만 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고대로부터 각종 제천의식은 제사장 계급의 권력을 과시, 유지,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그렇다. 제사의 주된 목적은 제사장, 즉 남성 집단의 우월한 지위를 보여주어 여성을 공식적으로 차별 대우하고 이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명절 때마다 이 현실을 목격하는 어린 남성들은 자연스레 내부 식민 지배의 현장을 목격하고 '외부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체득한다. 그러기에 남성들이 가정 내는 물론 가정 밖의 여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채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말라'는 말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나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남성들이, 명절 때마다 아픈 허리 두드리며 "나는 이 집안 종년이야"라고 말씀하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평생에 걸친 고발을 듣고도 모른 체하고 있다는 것이 여성을 하급 인간으로 여긴다는 단적인 증거다.

제사, 줄여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애야 한다. 다들 더 힘내 주시기를!


박신영 작가

박신영 작가


박신영 작가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