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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구 손질하는 것만 보면 목포의 맥가이버라고 한당께라" 

입력
2021.09.25 04: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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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목포 평화선구점
56년째 한 자리에서 선구점 운영
불황 없지만 후계자 없어
재활용 앞장 서 환경오염도 차단


김동윤 평화선구점 대표가 자신의 점포 앞에서 그물 손질을 하고 있다. 목포= 박경우 기자

김동윤 평화선구점 대표가 자신의 점포 앞에서 그물 손질을 하고 있다. 목포= 박경우 기자


"바다와 관련된 모든 것은 척척 손질해 선구(船具)의 맥가이버라고 한당께라."

민족 최대명절인 추석을 앞둔 16일 오후 3시. 전남 목포항구가 한 눈에 보이는 만호동 물항장 주변 도로에는 고기잡이에 쓰는 그물을 손질하는 분주한 손길이 이어졌다. 추석 연휴가 지나면 꽃게와 조기, 홍어 등을 잡기 위해 신안 앞바다와 먼바다로 출항하는 어선의 선주들이 그물과 닻, 로프(줄), 통발, 부표 등 선구를 정비하는 데 여념이 없다.

만호동의 물항장 주변에는 16곳의 선구점이 있다. 이중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평화 선구점 김동윤(72·남양어망) 대표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 폈다. 그는 "오늘 오전에 290만 원의 어망 제작을 주문받았다"면서 바쁜 손놀림으로 그물을 만지고 있었다. 김 대표 양손에 깊이 박혀 있는 상처의 흔적들은 그의 경륜을 가늠하게 했다.

평화선구점은 어선관련 용품 1,000여 점을 판매하고, 맞춤형 제작도 한다. 목포= 박경우 기자

평화선구점은 어선관련 용품 1,000여 점을 판매하고, 맞춤형 제작도 한다. 목포= 박경우 기자

한때 목포항 인근에는 선구점이 27곳이나 있었다.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동명어시장 방향으로 500m 정도 걷다 보면 나오는 김 대표의 평화선구점은 1,000여 개의 선구용품이 길거리까지 나와 있을 정도다. 선구점 근처에는 어망과 어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도 있고, 그물과 부표 등을 제작하는 어망 공장도 있다.

월급 15만 원 받으며 선구점 점원으로 시작

완도군 신지면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김 대표는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를 갓 졸업한 1965년 목포에서 선구점 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동네 어른들의 "목포에 가면 밥도 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 한마디만 믿고, 여비 240원을 챙겨 집을 나선 지 벌써 56년째다. 선구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은 15만 원이었다. 당시 송아지 한 마리가 5만 원이고 논 한 마지기가 15만 원이었던 시절이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선구점이 어느 정도 호황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남양어망 공장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김 대표. 목포= 박경우 기자

남양어망 공장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김 대표. 목포= 박경우 기자

김 대표가 평화선구점을 세운 것은 1975년 7월 15일. 그가 일을 시작한 곳은 목포 낚시점이다. 이 낚시점이 완도선구점에서 지금의 평화선구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낚시점 사장 박기환씨가 10년만 일하면 선구점도 물려주고 사위로 삼겠다는 말에 김 대표는 선구일을 배웠다. 10년 지나 독립한 김 대표는 박 사장 임종까지 지키는 양아들이나 다름없었다.

선구점이 호황을 맞으면서 김 대표는 당시 월급으로 고향에 논·밭과 소를 구입했다. 왕래가 불편한 신안군 등 섬으로 외상을 받으려 며칠간 출장을 다니면, 수당까지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10년이 지나 독립하겠다는 말에 작고한 박 사장이 자전거 한 대와 15만 원을 줬다. 고향에 모아둔 전답과 소를 팔아서 500만 원을 마련, 지금의 터에 70㎡ 점포를 얻어 평화선구점을 시작했다.

파시로 바다를 메웠던 1960년대 흑산도 예리항 풍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파시로 바다를 메웠던 1960년대 흑산도 예리항 풍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때 파시가 섰던 목포항


조선 시대 말 '무안부'에서 일제 강점기엔 '목포부'로 개칭된 목포시는 항구 도시로 급성장했다. 목포항은 1897년 10월 1일 개항, 일본의 곡물 수탈항으로서 기능을 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목포는 개항 전, 이미 바다를 지키는 수군기지가 설치돼 있었고, 수백 년 전부터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였다.

1900년대 초에는 조기와 홍어 등 파시(波市)가 열렸고, 1970, 80년대에 들어서는 소금 운반 장소로 유명했다. 당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출항했던 어선들은 2, 3일 간격으로 만선으로 입항했다. 항구 주변 술집이나 식당도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쇠락했다.

1980년대 목포항에는 소금을 실어 나르는 어선이 많았다. 전남 목포시 제공

1980년대 목포항에는 소금을 실어 나르는 어선이 많았다. 전남 목포시 제공

부산·원산·인천에 이어 4번째로 개항한 목포항은 일대가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서 문화재 120여 곳이 산재해 있다. 평화선구점 바로 앞의 물항장에 정박하는 안강망선(20톤), 연안복합(1톤 미만에서 1.5톤), 연안통발어업(2.5톤) 등 각종 어선과 인근 신안군 도서 지역의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 이 지역은 한때 목포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이었다. 경기가 좋을 때는 1평(3.3㎡)에 1,000여만 원까지 했다가 지금은 100여만 원 정도까지 떨어졌다. 앞으로 북항으로 어선이 이동하면 이곳에 남은 선구점들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평화선구점 뒤편에 자리한 선구 용품 창고. 김 대표가 각종 어망을 정리하고 있다. 목포= 박경우 기자

평화선구점 뒤편에 자리한 선구 용품 창고. 김 대표가 각종 어망을 정리하고 있다. 목포= 박경우 기자


맞춤형 선구로 불황 없이 인기 있는 평화선구점

과거 목포 인근 암태도와 자은도 등 신안 주변의 섬 지역과 진도·완도·해남군 등에서도 어선 관련 용품을 구입하기 위해 목포항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연육·육로가 발달하면서 수요나 매출이 크게 줄었다. 그럼에도 선구점 경기는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게 김 대표 얘기다. 그는 "선구점을 운영하면서 한 달에 2억 원가량 벌었다"며 "집엔 비린 돈 냄새가 가득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김 대표는 안강망 2척과 유자망 1척을 운영하면서 1980년대 초까지 5년간 조기 어업을 통해 수십억 원대 큰돈을 벌었지만, 사기를 당한 아픈 기억도 있다.

어선을 구입해도 그물이나 지주 설치를 못하는 섬 어민들을 대상으로 김 대표는 출장비를 선불로 받고 출장서비스도 했다. 안강망·유자망 그물, 6m 마장(그물을 칠 때 세우는 기둥) 설치, 부자(일명 행다·배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물위에 띄워 유지해주는 도구) 등 배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생산·제작하는 기술도 자신만 가지고 있는 노하우라고 자랑했다.

어선에서 사용되는 선구를 제작하는 김 대표의 손논림이 예사롭지 않다. 목포= 박경우 기자

어선에서 사용되는 선구를 제작하는 김 대표의 손논림이 예사롭지 않다. 목포= 박경우 기자

김 대표는 어민들이 배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선구점에 의뢰하면 맞춤형으로 제작한다. 요즘에는 꽃게 그물과 삼마이(속그물이 있고 겉그물이 있는) 그물이 가장 많이 팔린다. 오랜 시간 김 대표를 찾는 선주와 선원 등 단골도 많다. 김 대표 가게에 물건이 없으면, 다른 가게에 소개시키는 등 김 대표는 물항장 주변 선구점의 해결사로도 통한다. 외국인 선원에게는 각종 용품을 할인해 준다. 김 대표는 "장사꾼은 절대 손해 보고 팔지 않는다"고 농을 던졌다.

그는 선구점 인근 동명동에 남양어망이라는 공장도 33년째 운영 중이다. 공장 직원 3명과 함께 선구점을 오가며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선구점 운영은 자신과 바둑이가 지킴이다. 선구점과 물류점(창고)은 여러 대의 폐쇄회로(CC)TV와 바둑이가 한몫해 지금까지 도난사고는 없었다.

남양어망 공장에서 김 대표와 직원들이 맞춤형 제작 그물에 부자와 납(봉돌)을 부착하고 있다. 목포= 박경우 기자

남양어망 공장에서 김 대표와 직원들이 맞춤형 제작 그물에 부자와 납(봉돌)을 부착하고 있다. 목포= 박경우 기자

지난 6월부터 3개월간 매출 2억4,000여만 원을 올렸다고 자랑한 그는 "코로나19도 매출과는 상관이 없다"면서 "낙지와 홍어 등 산란기의 어종 보호에 그물이 필수라 거기에 쓰인 선구만 팔아도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신안에서 광성호(2.5톤)을 운영하는 강대성씨는 "선구점은 물건을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선마다 요구하는 물품을 맞춤형으로 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김 대표는 맥가이버처럼 주문만 하면 빈틈없이 제작을 해준다"고 치켜세웠다.

목포 선창가에 위치한 평화선구점 전경. 목포= 박경우 기자

목포 선창가에 위치한 평화선구점 전경. 목포= 박경우 기자


각종 재활용으로 바다 환경운동가 자처


몇 년 전까지 폐그물(해태망)이 바다에 버려져 환경오염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또 어선 스크류에 폐김발이 걸려서 배가 전복돼 막대한 피해를 입은 어민도 있었다. 김 대표는 5년 전부터 버려진 그물을 재활용해 돈도 벌고, 바다 환경운동가 역할을 자처했다. 이 폐그물은 멧돼지·노루·염소 등 산짐승으로부터 배추·고구마·인삼밭 등 농작물을 보호하는 그물로 재활용되고 있다. 폐그물 4m에 1만 원을 주고 구입해 손질을 거쳐 농가에 1만1,000원을 받고 판매한다.

사과·배·무화과 등 잘 익은 당도 있는 과일만 골라 먹는 새들을 막는 데도 재활용한 폐그물을 사용한다. 구명부기와 부표, 인명구조용 선구들도 재활용에 사용된다. 폐 구명부기를 재활용하는 업체 김모(46)씨는 "어선 관련 용품을 팔면서 폐선구 등을 수거하고 있다"면서 "요즘은 버리는 데도 돈이 들어가는데, 김 대표에게 가져다 주면 적지만 돈도 줘 항상 감사하다"고 말했다.


남양어망 공장엔 폐그물이 산적해 있다. 이 그물은 손질을 통해 재활용된다. 목포= 박경우 기자

남양어망 공장엔 폐그물이 산적해 있다. 이 그물은 손질을 통해 재활용된다. 목포= 박경우 기자


자식들은 선구 일에 관심없지만 후계자 찾는 김 대표

기독교 장로인 그는 3남매를 두고 있다. 법무부와 광주교육청에서 근무하는 두 아들과 초등학교 교사인 딸은 선구 일을 그만하라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김 대표는 평화선구점을 이어갈 후계자를 찾고 있다. 그는 "선구점 성공을 위해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했고, 남들 놀 때 자신은 일한다는 각오로 살았다"고 했다. 앞으로 10년 정도는 거뜬히 일할 수 있다는 김 대표는 "돈을 더 모아 여생은 고향 마을 친지들 자녀에게 장학금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목포= 박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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