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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점에서 다시... 꼬여버린 여정에도 우린 여전히 무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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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에서 ‘변방, 현지인만 사는 마을, 여행자의 발길이 드문 곳’의 교집합은 뜻밖의 무언가가 기다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것이 좋든 싫든 무료함과는 확실한 거리가 있다. 늘 새롭고, 기대가 없기에 때론 벅찬 감동으로 남아 다시 떠나게 하는 자양분이 된다.
산이그나시오에서의 마지막 날, 오늘은 더 새롭다. 토요일 밤의 파티가 예고되어 있어서다. 이미 숙소에서 마신 와인으로 흥을 충전한 뒤 파티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그런데 뭔가 기운이 싸늘하다. 안으로 들어섰는데 장대비가 그친 것만 같았다. 편의점에 어울리는 야외 테이블과 의자, 새파란 티셔츠를 입은 청년의 고음 불가 노랫가락, 텅 빈 댄스 플로어…. 왠지 초대받지 못한 손님 같은 기분이었다. 동네 주민 몇이 커플 댄스를 추다가 사라졌다. 우린 파티의 첫 손님이자 식사를 주문한 유일무이한 손님, 그리고 마지막 손님이었다. 내 생애 가장 허무한 파티였다.
다음날, 콘셉시온행 교통편을 다시 확인하라는 직원의 말에 따라 버스회사에 들렀다. 심한 폭우로 인해 땅이 끈끈이 트랩이다. 진흙으로 발 마사지는 제대로 했다. 천둥 번개와 함께 당도한 사무실에서 결국 비보를 접했다. 아마존 일대가 범람해 산라파엘과 콘셉시온을 잇는 도로가 끊겼단다. 아마존이 세계 기후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2,300㎞나 떨어진 이곳과의 연관성은 이해 불가였다. 눈에 보이는 저 끈끈이 트랩이 오히려 합당한 이유 같았다.
여기에서 또다시 죽쳐야 할까. 뾰족한 수가 없는 가운데, 순례길 출발지인 산타크루즈로 돌아가야 했다. 말인즉슨, 이곳에서 182㎞ 떨어진 콘셉시온으로 가기 위해 출발점인 산타크루즈로 468㎞를 후퇴했다가 다시 290㎞를 전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차선책 역시 최악이었다. 산타크루즈행 밤 버스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 불운의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낡은 좌석은 금방이라도 탈출할 것처럼 덜렁거렸고, 창문은 아무리 닫아도 곧 다시 열렸다. 그렇게 추위와 먼지와 가려움이 뒤범벅된 악몽의 버스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때론 절망의 끝에서 알 수 없는 희망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이대론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가 축적되어 갔다. 산타크루즈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6시. 장장 11시간을 버스 안에서 시달렸다. 우리의 처량한 신세와 달리 산타크루즈에는 아마존의 범람과는 전혀 무관한 일상이 흐르고 있었다.
순례길의 마지막 행선지 콘셉시온으로 가는 버스를 수소문해 보니, 돌아오는 길에 산하비에르까지 돌아볼 수 있는 노선이었다. 뜻하지 않은 행운이다. 이 두 마을은 원주민 부족의 입김이 강한 곳으로 유명하다. 치키토스 순례길 세계문화유산 중 산하비에르는 첫 번째, 콘셉시온은 네 번째로 예수회선교단이 정착한 곳이다. 한스로스(Hans Roth)의 복원 활동으로 17세기 건축물이 그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성당의 관전 포인트는 전혀 다르다. 콘셉시온 선교단 시설은 다소 체계적이다. 박물관을 포함하는 입장료를 받아 미로처럼 연결된 공간을 활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상적인 것은 성당 내부의 옛 조각물을 복원하는 작업 현장이 공개된다는 점. 현장 관람객 역시 후대로 이어지는 긴 역사의 한 조각이 되어 흘러가는 듯하다.
반면, 산하비에르에선 일단 멈춤이다. 성당 내외부가 2차원 인테리어다. 관람객이 그림의 일부가 된 듯한 환영에 휩싸인다. 예배당 내에 가만히 앉아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산하비에르에서 10년간 살며 지어 올린 마틴 슈미드(Martin Schmid)의 예술적 노고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산타크루즈로 돌아오는 길, 날이 거짓말처럼 개었다. 3일이면 충분할 거라 여긴 순례길 탐방이 어느덧 9일로 늘어졌다. 산라파엘과 콘셉시온 사이의 도로는 지금 어떠할까. 먼길을 돌지 않고 좀 더 기다렸으면 어땠을까. 인생에 ‘만약’이 없듯 여행에서도 가정은 부질없다. 밀린 숙제를 끝낸 듯 개운한 기분만 갖고 가겠다. 우린 여전히 무사하고, 다음 여행길에 오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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