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총리 vs 검찰' 전면전 치닫는 아이티 대통령 암살사건 수사

입력
2021.09.15 20:0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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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암살 직후 총리-핵심 용의자 통화 확인"
검찰 "대통령 암살에 총리도 연루"... 기소 요청
총리는 '검사장 해임' 맞불… 두 달째 사건 미궁
정치 혼란에 민심 폭발… "아이티엔 정의 없다"

지난 7월 20일 아이티 총리에 취임한 아리엘 앙리가 취임 연설을 하고 있다. 포르토프랭스=EPA 연합뉴스

지난 7월 20일 아이티 총리에 취임한 아리엘 앙리가 취임 연설을 하고 있다. 포르토프랭스=EPA 연합뉴스

지난 7월 초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에서 발생한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해 현직 총리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아이티 검찰은 범행 연루 정황이 포착된 총리에 대한 기소를 판사에게 요청했고, 총리는 즉각 담당 검사장을 해임하며 맞불을 놨다. 초유의 대통령 암살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 그리고 정국 혼란 수습에 매진해야 할 총리 간 대립이 사실상 전면전으로 치닫는 모습이다. 그 사이 권력 공백과 지진 피해로 시름하는 아이티는 더욱 더 극심한 혼돈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14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아이티 대통령 암살 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베드포드 클로드 검사장은 “아리엘 앙리 총리가 조브넬 모이즈 전 대통령 암살에 연루된 증거를 충분히 확보했다”면서 담당 판사에게 앙리 총리를 기소하고 출국 금지 명령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검찰은 이미 소환장도 발부한 상태다. 의사 출신인 앙리 총리는 모이즈 전 대통령 피살 이틀 전 차기 총리 후보자에 지명됐고, 사건 이후 클로드 조제프 당시 임시총리와 자리를 놓고 다투다 국제사회 지지 속에 7월 20일 공식 취임했다.

그런데 검찰 수사 결과, 앙리 총리가 모이즈 전 대통령 사망 직후인 7월 7일 오전 4시 3분과 4시 30분, 두 차례에 걸쳐 약 7분간 핵심 용의자 조제프 바디오와 통화한 사실이 드러났다. 법무부와 반부패기구에 몸담았던 정부 관리 출신인 바디오는 올해 5월 윤리규정 위반으로 해고됐고, 현재 도주 중인 상태다. 문제의 통화 당시 바디오는 대통령 사저 부근에 있었고, 앙리 총리는 한 호텔에 머물렀던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앙리 총리는 암살 연루 의혹을 부인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검찰의 기소 방침이 나오자 “심각한 행정상 과실”을 이유로 클로드 검사장을 해임하는 강수를 뒀다. 곧바로 새 검사장도 임명했다. AP통신은 “혼란에 휩싸인 나라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 조치”라고 지적했다.

물론 클로드 검사장이 자리를 지켰다 해도 ‘앙리 총리 기소’가 가능했을지는 미지수다. 아이티 법은 사법당국이 국가 수반의 승인 없이 고위 공무원을 기소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현재 대통령이 공석 상태라 사실상 앙리 총리가 국가 수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앙리 총리의 노골적 방해 탓에 두 달째 수사는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사건 실체도 미궁에 빠져 있다. 암살 사건 발생 초기에 증거를 수집했던 사법부 관리들은 살해 협박을 받자 잠적했고, 수사 활동에 관여했던 법원 직원 1명은 의문사를 당했다. 첫 번째 담당 판사도 “일신상 문제”라는 미심쩍은 이유를 들어 스스로 물러났다. 대통령 경호원, 아이티계 미국인 3명, 콜롬비아 용병 18명 등 용의자 40여 명이 체포됐으나, 누가 왜 대통령 살인을 지시하고 그 대가를 지불했는지 등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진실이 멀어진 사이, 아이티 정치권은 아귀다툼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모이즈 전 대통령 암살 직후 대통령직 승계권을 주장했던 조제프 랑베르 상원의장은 이날 언론 생중계를 통해 또다시 대통령직 인수 선언을 시도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NYT는 아이티 외교가를 인용해 “랑베르 의장이 국회로 들어가는 걸 막으려고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미국 정부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랑베르 의장에게 독단적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모이즈 전 대통령 피살 당시 함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던 마르틴 모이즈 영부인도 차기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AP는 “정치 혼란과 폭력 사태가 지속되면서 올해로 예정됐던 총선도 내년으로 미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이 같은 정치 혼란을 지켜보는 민심은 폭발 직전이다. 인구 60%가 빈곤층일 정도로 경제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지난달 중순 규모 7.2 강진으로 2,200여 명이 숨진 데 이어, 곧바로 태풍까지 덮치면서 나라는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최근 아이티 시민보호국은 앙리 총리 사퇴를 요구하면서 국제사회에도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NYT는 아이티의 앞날이 험난하기만 할 뿐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한 시민의 말을 전했다. “아이티에선 정의를 찾기 어렵다. 모이즈 대통령을 죽인 사람들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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