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니는 진짜 천재일까

입력
2021.09.16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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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에인절스의 오타니 쇼헤이가 8월 19일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코메리카 파크에서 열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 선발투수 겸 1번 타자로 나서 8회초 1점 홈런을 치고 있다. 디트로이트=AP 뉴시스

LA 에인절스의 오타니 쇼헤이가 8월 19일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코메리카 파크에서 열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 선발투수 겸 1번 타자로 나서 8회초 1점 홈런을 치고 있다. 디트로이트=AP 뉴시스

'거인의 별' 'H2' '터치'. 어릴 적 심취했던 야구 만화는 전부 '만화의 나라' 일본 작품이었다. 마운드에서 불 같은 강속구를 뿌리고, 타석에선 홈런을 펑펑 때리는 강타자가 나온다. 만화책을 덮으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판타지였다. 메이저리그를 충격에 빠뜨린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의 등장 이전까진 그랬다. 오타니를 처음 본 건 2015년 야구 국가대항전 프리미어12에서였다. 당시 그의 나이 21세. 한국과의 준결승에서 160㎞대의 직구와 140㎞대의 마구 같은 포크볼을 연신 던지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역할 분담이 철저한 현대 야구에선 천연기념물에 가까운 투타 겸업, 극강의 '이도류(二刀流)'로 진화한 오타니야말로 현실로 튀어 나온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이다. 2018년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그는 4년 차를 맞은 올해 타자(44홈런)로, 투수(9승)로 장편 만화를 써내려가고 있다. 현대 야구에서는 오타니와 비교할 선수가 없어 한 세기 전 전설 속 스타 베이비 루스(1918년ㆍ13승-11홈런)의 이름을 끄집어내게 만들었다.

오타니에 열광하는 건 그의 탈(脫)아시아적 운동 능력 때문이다. 최고 구속 100마일(약 163㎞)의 강속구를 던지는 데다, 타구 평균 속도는 메이저리그 타자 상위 1%인 94마일(약 151㎞)이다. 스즈키 이치로는 기술적인 타격으로 정상에 섰고, 류현진은 제구력으로 살아남았다. '힘'과 '세기'로 메이저리그를 평정한 오타니는 '아시아 선수는 테크니션'이라는 상식을 깼다.

메이저리그 입단 때 공개돼 화제가 된 그의 고교 시절 '인생 계획표'를 다시 찾아봤다. 거기엔 일본프로야구 8개 구단 이상의 드래프트 1순위가 되겠다는 목표와 함께 이를 위해 필요한 8가지,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계획까지 꼼꼼히 적혀 있다. 160㎞ 던지기와 같은 야구 관련 항목만이 아니다. 일희일비하지 않기, 승리를 향한 집념,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기, 머리는 차갑게ㆍ심장은 뜨겁게 등 인생 전반에 대한 내용들이다.

그중 눈에 띄는 건 운(運)에 대한 항목이었다. 오타니는 운을 위해 인사하기, 쓰레기 줍기, 청소, 심판을 대하는 태도, 책 읽기 등 목표를 적어놨다. 운은 그저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인데 운을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남다른 사고다.

42세까지의 구체적인 목표도 세워뒀다. 18세에 메이저리그 구단에 입단해서 40세에 은퇴해 41세에 귀국하는 계획이다. 19세에 영어를 통달하고, 20세에는 메이저리그에 오른다. 22세에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을 따내고, 24세에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다. 25세에는 구속 관련 세계 최고기록으로 175㎞를 던지는 게 목표다. 말도 안 되는 꿈 같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현실로 바꿔가고 있다. 고교생 오타니가 작성한 학생부에는 "야구계 역사를 바꾼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다" "내가 이 길의 개척자"란 글이 굵직하게 적혀 있다.

오타니는 지난 5일 27번째 생일을 맞았다. 지금도 집과 야구장만 오가는 오타니가 하루쯤은 바깥바람을 쐬지 않을까 파파라치들이 집 근처에서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시아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형의 야구선수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성환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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