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 강화가 중앙정부 약화는 아니다

입력
2021.09.15 00:00
26면


지방분권화의 긍정적 효과 존재 불구
지역 간 격차 확대 나타나
중앙정부의 조정·배분 기능 중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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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존스와 같은 사학자는 유럽이 일찍이 아시아를 앞서게 된 요인의 하나로 다수의 소규모 국민국가들이 경쟁했던 분권화된 정치적 환경을 꼽은 바 있다. 중국처럼 대륙 전체를 지배한 대제국과 달리, 주민이 이주해 갈 수 있는 이웃 국가들이 존재했던 유럽 국가에서는 지배자의 압제와 착취가 억제되었으며, 이로 인해 개인이 창의성을 발휘하고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경제사학자 피터 린더트는 19세기 말 프러시아가 공공 초등교육 보급의 선두주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을 교육·행정·재정의 분권화로 보았다. 분권화로 인해 한 지역의 필요성과 역량을 반영한 교육 혁신이 가능했고, 이는 지방정부 간 경쟁과 모방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풀이된다.

역사적인 사례가 보여주듯 지방분권화는 지역과 국가 발전에 긍정적일 수 있다. 30년 전 지방의회 선거가 치러지면서 부활한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 역시 지역 사정을 반영한 예산 편성과 집행의 초석을 놓고, 다양한 실험적·혁신적 정책 도입을 가능하게 하는 등 분권화의 바람직한 효과를 가져왔던 것으로 평가된다. 선거 압력과 지자체 간 경쟁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지역 주민의 권익을 신장하는데도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방분권화가 가져온 결과가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지역 간 격차 확대는 지방균형발전을 지방자치 목적의 하나로 규정한 '지방자치법'의 제1조를 무색하게 한다. 행정수도 건설, 공공기관 이전과 같은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구,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지역 간 불균형은 점점 커지고 있다. 예컨대 30년 전 비수도권 인구의 4분의 3 수준이었던 수도권 인구는 얼마 전 비수도권 인구를 추월하였다. 서울과 수도권은 인구 과밀화와 주택가격 폭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른 지역의 사람과 일자리를 빨아들이고 있다.

지방분권화에 기초한 지자체들의 조율되지 않은 일부 정책들은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지역 간 빈익빈 부익부 경향을 강화하기도 한다. 지역 인구 감소에 대응하여 전입과 정착을 유도하고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고자 하는 지자체 간의 경쟁적인 현금성 지원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재정적인 여력이 부족한 소규모 지자체들은 이러한 제로섬 게임에서 크고 부유한 지자체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으며, 인구 감소 → 세수 저하와 재정지출 효율성 악화 → 지역 인프라 및 경제적 여건 악화 → 추가적인 인구 감소의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크다.

인구 및 사회경제적 변화로 말미암은 지역 간 불균형 심화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조정·분배 기능이 요구된다. 엄격한 지방자치를 실시하는 독일의 사례는 우리의 반면교사이다. 현재의 독일 연방제 헌법하에서는 연방정부가 지방정부의 지출 대부분을 직접적으로 지원할 수 없다. 필자가 2년 전에 만났던 구 동독지역의 소도시 비젠부르크(Wiesenburg) 시장에 따르면, 이러한 제도적 제약이 점차 심각해지는 지방인구 감소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한다.

재정 및 행정적인 권한에 있어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비대칭성은 지방자치 발전의 걸림돌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지자체 간 격차 확대는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지방분권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중앙정부의 권한과 기능을 축소하는 것은 자칫 지역 간 불균형 확대에 대응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다른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정부가 동일한 국민에게 주는 혜택에 큰 차이가 생기는 현실이 지방분권화가 추구하는 다양성은 아닐 것이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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