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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조차 불평등한 세상" 나는 의사 가운을 벗고 경제학자가 되었다

입력
2021.09.21 14:00
0면

<30> 김현철 경제학자·의사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의과대학 졸업반이던 20년 전 일이다. 나는 강남세브란스병원 유방암센터 실습생이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의 환자 구성은 두 부류다. 강남에서 오신 부유한 분들과 멀리 지방에서 찾아오시는 대개는 가난한 분들. 많은 강남 환자들은 유방암을 조기에 발견했다. 하지만 지방 출신 환자들은 암이 많이 진행된 다음에 비로소 병원에 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건 부당하지 않나!’ 하는 외침이 들렸다.

한달 실습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얼굴에 주름 가득한 여성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얼핏 봐선 노인 같았는데, 차트를 확인해보니 실제 나이는 40대 중반이었다.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았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진찰해보니 유방은 이미 괴사가 시작되었고, 겨드랑이 림프절은 암세포로 가득 차 있었다. 경험이 일천했던 내가 보기에도 말기암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아, 이걸 어쩌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환자가 실오라기같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선생님예… 이거 암 아니지예…” 라고 물었다.

난 그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뭐하다가 이제서야 병원에 왔냐고. 이 동네 중년여성들은 암검진을 통해 손톱보다 작은 암도 발견한다고. 나는 이런 현실이 원망스러워 자리를 피해 울어버렸다.

그날의 눈물은 그 환자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회의 약자들이 더 아프고, 더 일찍 죽는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슬픔이었다. 내가 진료실에서 경험한 것처럼 정말 우리나라의 가난한 하위 20%는 부유한 상위 20%에 비해 유방암으로 2배 넘게 죽는다.

이러한 건강불평등이 사회·경제학적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나는 의과대학 졸업 후, 전문의 과정 대신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낮에는 경제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응급실 당직으로 학비를 버는 생활을 한동안 지속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코넬대학을 거쳐 지금은 홍콩과학기술대학에서 경제학 및 정책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제학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주로 국내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유학을 가서 저개발국가를 위해 일하는 친구들과 교수들을 만나면서, 대한민국의 사회적 약자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약한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저개발국가의 엄마와 아이들이다.

경제학 박사과정 시절, 나는 선배 의사들과 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우고 운영하는 일에 동참했다. 그 곳에서 다양한 보건 및 교육 사업을 하면서, 이들을 위한 학문인 개발경제학을 전공하였다. 내 연구의 절반은 한국의 사회적 약자들, 또 다른 절반은 저개발국가의 사회적 약자들이다. 지난 15년 중 5년은 미국에서, 다음 5년은 한국에서, 마지막 5년은 말라위, 에티오피아, 필리핀 등의 저개발 국가에서 보냈다.

아프리카에는 세계 3대 전염성 질환인 결핵, 에이즈, 말라리아가 창궐한다. 특히 말라리아는 많은 어린아이들의 삶을 빼앗아간다. 저개발국가의 부모들은 질병에 대한 지식이 없고 병원 갈 돈이 없어서, 자식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치료를 받으러 온다. 이곳에서도 소수의 부유층은 조기에 진단하고, 그래서 훨씬 쉽게 치료받는다. 20년 전 내가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느꼈던 환자들의 현실과 매우 흡사하다.

말라위의 대양누가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엄마가 말라리아로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를 업고 왔다. 하지만 미처 손쓸 겨를도 없이 아이를 잃고 말았다. 엄마는 통곡했다. 그 아픔의 비명 소리가 너무도 청명한 말라위의 아름다운 가을 밤하늘에 한참을 울려 퍼졌다. 극한의 슬픔과 눈부신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것이 초현실적이라 느끼며, 나는 무기력하게 지친 몸을 침대에 뉘였다.

나는 종종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우리 아이들과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겹쳐진다. 세월호의 침몰로 학생 250명을 포함한 300여명이 사망했고, 우리는 그 어린 생명들이 죽어가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아이들도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5세 미만 아동 1,000명 중 약 4명이 죽는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50~150명이 사망한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2014년 에티오피아의 5세 미만 아동 사망은 1,000명 중 72명이다. 인구 1억1,500만 명의 에티오피아는 5세 미만 아동이 인구의 약 15%인 1,725만 명이고, 이 중 124만2,000명이 죽는다. 이 아이들이 만일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단 6만9,000명만 사망했을 것이다. 결국 5년 동안 117만3,000명의 어린 아이들이 선진국이 아닌 에티오피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죽어간 것이다. 하루에 자그마치 643명이다. 에티오피아의 세월호는 5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을 데리고 매일 2척씩 침몰하고 있는 셈이다. 매일 2척이.

나는 정책을 연구하고 평가하는 경제학자이다. 학자는 질병 및 가난과의 전쟁에서 후방 작전 본부에서 일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최전선의 위험함과 치열함을 모르는 지휘관은 병사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다. 후방에서 정책을 연구하는 학자 또한 숫자에 빠져 진짜 현장의 아픔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난 늘 기억하며 살고자 한다.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죽은 자식을 보내며 울부짖던 엄마들의 통곡 소리, 그리고 20년 전 그날 날 울게 했던 촌부의 아픔을.

홍콩과기대 경제학과 및 공공정책학과 교수

홍콩과기대 경제학과 및 공공정책학과 교수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계 종사자라면 누구든 원고를 보내주세요.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뉴스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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