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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왜 세 오빠를 북한으로 보냈을까, 4·3을 알고 비밀이 풀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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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인 아버지는 자신과 별 관련도 없는 북한을 조국으로 여겼다. 재일조선인북송사업이 한창이던 1970년대 김일성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며 일본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세 아들을 북한으로 보냈다.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는 평생 북한을 위해 일했다. 어머니 역시 일해서 번 돈의 대부분을 북한에 사는 아들들과 손주들에게 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왜 그토록 북한을 추종하며 살았을까.
일본 사회 소수자인 재일한국인 가운데서도 소수자인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 조선학교 출신인 양영희(57) 감독은 부모에 관한 궁금증을 바탕으로 자신의 첫 영화인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2005)을 만들었다. 이후 평양에 사는 조카 선화를 중심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다시 조명한 '굿바이, 평양'(2009)도 내놨다. 일본 영화전문지 키네마준보가 2012년 최고의 영화로 꼽은 자신의 첫 극영화 '가족의 나라'까지 만든 그는 부모가 왜 평생 북한을 위해 살았는지 뒤늦게 알게 됐다. 제주 4·3사건 때문이었다.
9일 경기 파주 메가박스 파주출판도시에서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양 감독이 '가족의 나라'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영화다. 개막식에 앞서 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양 감독은 "원래 극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면서 4·3사건 이야기를 처음 꺼내시는 걸 듣고 카메라를 다시 들게 됐다"고 말했다.
'디어 평양'에서 아버지를, '굿바이, 평양'에서 조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 어머니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제주 출신 부모를 둔 어머니 강정희씨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일본 패망 직전 미군 공습을 피해 제주로 피란을 떠났다. 3년 뒤 4·3사건으로 약혼자와 외삼촌들, 사촌형제들이 모두 군경의 총칼에 희생되자 목숨을 걸고 제주를 탈출했다. 등에는 세 살 여동생을 업고 한 손은 남동생을 꼭 잡고 30㎞를 걸어 밀항선을 탔다. 3년 만에 겪은 두 번째 피란. 4·3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4·3 이야기하면 위험하다' '아무 관계 없으니 묻지 말라'던 강씨는 여든이 넘어서야 어린 시절 겪었던 핏빛 트라우마를 조금씩 딸에게 꺼내기 시작했다.
"오사카에 제주 출신 조선인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지리상 가까우니까 그런 줄 알았어요. 4·3을 피해 피란 왔을 거라곤 전혀 생각 못했죠. 엄마가 왜 남한을 생리적으로 거부했는지, 왜 남한 사람들은 잔인해서 싫다고 했는지, 왜 K팝 가수조차도 싫다고 했는지 뒤늦게 알게 됐어요. 알고 보니 내가 난민의 딸이었던 거죠. 맙소사, 쉰이 넘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았네요.(웃음)"
4·3의 기억을 꺼낸 뒤 어머니는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 그 덕에 평화가 찾아왔다. 빚까지 내서 북한에 돈을 보내던 어머니와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로 돌아간 어머니는 이제 남편과 세 아들, 어린 영희와 함께 산다. 조선 국적인 어머니는 양 감독의 오랜 노력 끝에 일회용 여권을 받아 70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제주 땅을 밟는다. 제주 4·3 70주년 추모식에도 참석하지만 어머니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입을 다문다. 양 감독은 그 옆에서 눈물을 글썽인다. "실은 엄마를 많이 탓해 왔는데 4·3을 알고 나니 엄마를 탓하지 못하겠어요."
"엄마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영화"에서 끝났을지도 모르는 작품을 장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준 사람은 남편인 아라이 가오루씨다. 훗날 물심양면으로 양 감독을 지원해주게 되는 사위를 처음 만났을 때 어머니 강씨가 준비한 음식이 닭백숙인데 이는 곧 영화 제목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아라이씨는 이후 장모에게 배운 대로 백숙을 끓여 장모, 아내와 함께 먹기도 한다. 글을 써서 번 돈으로 이 영화의 제작비를 지원한 그는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엄마를 찍으며 단편쯤 될까 생각했는데 그때 조금 특이한 일본사람이 나타났어요. 나랑 좀 만나기 시작하자마 '어머님께 인사 드리러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일본인이 김일성 초상화가 있는 집에 간다니, 재밌겠네, 영화가 될 수도 있겠어' 하고 생각했죠. 제목은 이데올로기가 달라도 밥을 함께 먹고 이야기하며 공존하자는 뜻을 담았습니다. 함께 먹는 입이어서 식구(食口)라고 하잖아요. 저도 아버지와 사상이 달라서 오랫동안 싸웠고 함께 밥을 먹는 데 10년이 걸렸어요."
양 감독은 젊은 시절 아버지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10대 후반 11년 만에 평양에서 다시 만난 오빠들은 "영희야, 넌 우리 몫까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자본주의를 누리며 재밌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 뜻으로 그는 집을 뛰쳐 나와 극단에 들어갔다. 방송국에서 뉴스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 6년간 머물기도 했다.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다니며 "우리 가족만큼 특이하고 이상한 가족도 없을 것"이란 생각에 1990년대 후반부터 가족을 찍기 시작했다.
한때 가족에게서 벗어나려 했던 그는 "해방되고 싶어서" 영화를 찍게 됐다고 했다. "저 자신이 해방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어요. 재일한국인이라는 소수자의 삶에서, 조총련 활동가의 딸이라는 사실에서, 북한에 오빠들이 있는 가족 배경에서, 북한에 아들까지 바친 부모님에게서 해방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20대까진 도피하며 살았는데 서른 살쯤 되니 좀 뻔뻔스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내 배경이 재밌게 느껴졌어요. 도망가고 피하면 안 될 거 같았어요. 정면으로 마주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힘드니까."
양 감독의 영화들은 한 가족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거기엔 남과 북으로 갈린 한국의 현대사와 한일 간의 갈등, 남·북·일 3개 정부 사이에서 고통을 겪었던 재일한국인의 역사가 담겨 있다. 양 감독과 어머니 사이에서 '평화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아라이씨는 한국과 일본이 나아가야 할 미래를 은유하기도 한다. 양 감독은 "한 사람의 인생을, 가족을 이해하는 데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사회나 국가를 이해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나"라면서 "알면 알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머니의 고백과 남편의 등장은 양 감독을 여러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굿바이, 평양'부터 '가족의 나라'를 찍을 때까진 우울증에 걸려 있었어요. 죽고싶다는 생각만 하고 살았죠. 내 가족을 그린다는 게 힘들었고 북한에 있는 가족을 걱정하는 것도 힘들었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어요. 책을 쓰고 방송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엄마한테 드리면 전부 북한으로 가니 그것도 골치 아팠죠. 번아웃이 오기도 했고요. 북한에 있는 가족 이야기만 하면 술 마시고 울었어요.(양 감독의 큰오빠는 아버지와 같은 해인 2009년 세상을 떠났다) 혹시라도 내 영화 때문에 북에 있는 가족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죄책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술은 이제 완전히 끊었어요. 남편을 만난 뒤론 죽고싶다는 생각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됐죠."
그는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관객들에게 입문서 역할을 했으면 한다는 바람도 전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지만 전쟁과 피란, 북송사업, 조총련, 김일성 초상화 등 많은 것이 나옵니다. 역사책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진 않았지만, 한 사람 안에 얼마나 많은 역사가 스며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영화를 보고 4·3이 뭔지, 재일교포와 조총련은 뭔지 검색해본다면 더 좋겠죠. 또 하나, 제 영화를 보고 부모님의 청춘 시절이랄지 가족과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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