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대풍을 위한 다짐

입력
2021.09.05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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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이 지나자 새벽바람에도 선선한 기운이 배어난다. 계절이야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기 딱 좋다지만 손바닥만 한 텃밭도 농사라고 여기도 농번기가 있고 농사일지가 있다. 낮 기온이 30도, 밤 기온이 25도를 넘지 않으면 김장 준비를 하라고 했던가. 나도 몇 주 전부터 집과 텃밭을 오가며 땅을 고르고 거름을 하고 멀칭을 하고 지난주에는 마침내 배추 모종 80촉을 심고, 무, 갓, 쪽파, 당근, 가을상추 등을 파종했다.

텃밭생활이 10년이라지만 사실 배추 한 번 제대로 키워낸 적이 없다. 나 같은 얼치기 도시농부들이 대부분 비슷한 수준일 듯싶다. 농사를 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바쁜 일과 끝에 일주일에 겨우 한두 번 찾는, 그저 놀이터 같은 공간이 아닌가. 언젠가 “왜 텃밭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게, 난 왜 주말놀이로 텃밭을 선택하고 그것도 왜 이렇게 열심히 매달리는 걸까? 매주 휴일이면 거의 예외 없이 달려와 흙, 잡초, 농작물과 번번이 지기만 하는 싸움을 한다. 제때 돌보지 못한 탓에 오이, 가지, 호박은 팔뚝만큼 커지고 참외는 짓무르고 고랑마다 잡초가 농작물보다 크게 자라기 일쑤다. 동네 슈퍼에만 나가도 훨씬 싼값에 더 예쁜 식재료를 마련하겠건만 농기구에 퇴비에 비료값, 심지어 오가는 자동차 기름값까지 계산하면 손해도 그런 손해가 없다. 그런데도 일주일에 한 번은 1시간 남짓 거리의 텃밭을 찾아야 마음이 편하니.

전에도 어딘가에서 얘기했지만 내가 애써(?) 만들어 낸 대답은 “텃밭은 반려동물과 같다”다. 늘 주인의 손길이 필요하고 돈과 정성까지 들여야 만족하는 반려동물. 우리 인간에게 외면당하면 기어이 야생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도 텃밭은 반려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끔 이 화상을 어이할꼬 투덜대다가도 잡초 가득한 밭을 바라보면 주인 게으른 반려동물 보듯 안쓰럽다. 옛날 사람들은 벼농사, 과수농사를 하면서도 소일거리로 텃밭을 일구었다. 텃밭이 도시와 멀어진 후, 도시사람들이 반려동물을 챙기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배추를 키우려면, 모종을 심기 2, 3주 전에 붕사와 석회를 하고 결구가 될 즈음엔 보름 주기로 웃거름을 해준다. 11월경 배춧잎을 묶는 것은 결구가 아니라 동사 염려 때문이다. 배추는 추위에 강해 영하 8도에서도 버티지만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 영하 3도에서 얼기도 한다. 나도 글쟁이답게 농사를 글로 배운 터라 이론으로야 남 못지않다. 다만 현실은 매번 책을 벗어나고 만다. 배추는 벌레에 먹혀 잔뜩 스트레스를 받거나, 잎보다 구멍이 더 많은 망사신세를 면키 어렵다. 오도이촌, 아니 기껏 육도일촌 주제에 농약 없이 배추를 키우겠다고 까분 세월이 허망하다. 그러고 보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실패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나름의 가르침을 얻은 것도 이곳 텃밭에서였다.

올해는 나도 마음가짐이 다르다. 애써 피하던 농약질도 하고 이웃 농부어르신께 귀띔도 들었다. 정식과 파종까지가 인간이 할 일이고 나머지는 햇볕과 바람과 비가 해준다던가. 자연이 허락하는 정도만 얻어먹자고 매번 다짐을 하건만, 이랑을 준비할 때면 욕심이 나는 것도 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올해는 부디 대풍이 들어, 남의 배추 더하지 않고 내 소출만으로 김장이 가능하기를 빌어본다.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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