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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임 기술은 왜 피임 기술을 앞서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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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1세기에 월경하는 몸으로 살아야 한다니 통탄스럽다. 평소보다 인간 존재와 세계의 악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싶을 때는 다음 날 꼭 피를 본다. 주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월경전증후군(PMS)으로 고통받고, 본격적으로 월경이 시작되면 통증이 온다. 아랫배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화장실도 자주 가며 운동도 평소만큼 잘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피가 샐까 봐 염려하느라 생리대, 탐폰, 생리컵, 생리팬티 등 다양한 월경 관련 제품과 씨름하며 일상생활에 제약이 많아진다. 수영장에 가는 것도, 헬스장에 가는 것도 하다못해 버스에 앉았다 일어서는 것도 신경 쓰인다.
여자는 월경의 시작과 함께 그것을 은폐하는 법을 배운다. 슈퍼마켓에서 생리대를 살 때마다 판매원은 자연스럽게 아래쪽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 따로 담아준다. 지구상 가임기 여성 대부분이 한 달에 최소 사나흘은 24시간 피를 흘리며 지내는데 모두가 이토록 월경혈을 잘 처리한다니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자고 일어난 사람 입 주변에 마른 침 자국처럼, 치아 사이에 낀 고춧가루처럼, 깔끔하다는 인상은 못 주더라도 2~3일에 한 번쯤은 엉덩이 뒤에 검붉은 핏자국을 남긴 여자를 길거리에서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월경과 관련해서 내게는 세 번의 혁명이 있었다. 첫 번째 혁명, 생리대에서 탐폰으로의 변화. 월경 중에도 목욕탕이나 수영장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월경통이 더 심해졌다. 두 번째 혁명, 탐폰에서 생리컵으로의 변화. 일주일간 지속하던 월경이 사흘 만에 끝났다. 체내에 직접 삽입해야 하는 생리컵 사용법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지만, 적응하고 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내 삶에 월경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욕심을 냈다. 진짜로 월경을 없애고 싶었다. 그래서 임플라논 시술을 받았다. 이것이 세 번째 혁명이다. 임플라논은 성냥개비 크기의 이식형 피임제로 왼쪽 팔 상완 피부 아래에 삽입하면 3년간 피임 효과가 있다. 피임을 위해 만들어진 제품이지만 부작용 중 하나로 월경이 줄거나 멈춘다. 나는 이를 기대하고 임플라논 시술을 받았다.
임플라논 덕분에 이제는 월경을 거의 하지 않는 몸으로 지낸다. 배란통이나 월경통도 줄어 생활이 혁신적으로 편해졌다. 그러나 임플라논도 완벽하지 않아서 굉장히 불규칙적으로 부정 출혈을 경험한다. 부정 출혈을 겪을 때마다 또다시 통탄스럽다. 이렇게 과학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어째서 월경 관련 기술은 이토록 허접한가? 피임 기술은 왜 여전히 이렇게 여성의 몸에 무리를 주는가?
여성의 생식력과 관련한 기술은 오직 임신과 출산과 연결지어질 때만 중요해진다. 매달 한 번씩 겪는 월경은, 얼마나 많은 여성이 불편함을 느끼든, 임신의 실패를 의미하고 따라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여성 스스로 처리하면 그만인 불결하고 꿉꿉하고 은폐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월경과 관련해 세 번의 혁명을 경험하는 동안 다양한 반응에 직면했다. 탐폰을 시도할 때에는 ‘처녀막이 손상되면 어떡해’ 소리를 들었다. 임플라논 시술을 한 뒤에는 반응이 더 다채로웠다. ‘그거 성매매 여성들이 하는 것 아니야?’ ‘나중에 아이 갖는 데에 문제 생기면 어떡해?’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내게 잠자리 상대에게 임플라논 시술을 한 것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 모든 반응이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설사 성매매 여성이 임플라논 시술을 많이 한들 그것을 내가 한 게 무엇이 문제라는 걸까. 임플라논 시술은 제거 후 바로 가임력이 회복되지만 설사 회복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알고 내가 택했다면 그게 무엇이 문제라는 걸까. 잠자리 상대에게는 도대체 왜… 어째서… 어쩌라고…
일련의 반응을 보며 깨달았다.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쾌적한 삶을 위해 월경을 조절하는 여성을 불손하게 본다는 것을. 여성에게 기대되는 삶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자궁으로서의 삶이니까.
월경과 피임과 관련한 기술은 이리도 지지부진하지만 여성을 임신시키기 위한 기술은 꽤 많이 발전했다. 2019년 과학기자로 일하던 당시 냉동 난자 시술을 취재하기 위해 국내에서 난임 치료로 유명한 병원을 방문했었다. 두 병원 모두 '가임력보존센터'에서 냉동 난자 시술을 하고 있었다.
병원 로비에 들어서니 6개의 거대한 냉동 탱크가 전시돼 실시간 모니터링 중이었다. 탱크 속에는 배아, 난자, 정자가 냉동돼 있었다. 임신 성공률은 난소 나이에 따라 절대적으로 달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자궁은 40~60대에도 가임력이 비교적 잘 보존되므로, 이론상으로는 20대에 '신선한' 난자를 채취해 얼려두면 완경이 된 60대에도 외부에서 호르몬을 투여하면 임신이 가능하다.
2014년 10월 페이스북과 애플은 자사 여직원들에게 최대 2만 달러(약 2,259만 원)의 난자 냉동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에서는 난자 냉동 열풍이 불었고, 페이스북과 애플은 우수한 여성 인재를 유치하겠다는 측면에서 직원 복지 정책으로 난자 냉동 비용 지원을 내세웠다.
난자 냉동은 시험관 아기 시술과 기본적인 원리와 과정이 같다. 차이점은 난자를 얼리느냐, 배아를 얼리느냐다. 사람마다, 나이마다 다르지만 임신 성공률도 20~30%로 시험관 아기 시술 1회와 비슷하다. 난자를 얼려두었다고 해서 추후에 임신에 꼭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얼마나 많은 난자를 채취해 냉동해 두었느냐에 따라서, 채취한 난자의 상태에 어떤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난자를 한 번 채취할 때 비용은 200만 원 정도다. 보통 한 달에 하나씩 난자가 배란되므로 냉동 난자 시술 역시 시험관 아기 시술처럼 난자 채취 전 과배란주사를 맞아 난자의 생성을 촉진한다. 한 번에 채취할 수 있는 난자의 개수는 나이와 개인의 난소 상태에 따라 다르다. 과배란주사를 맞는 과정에서 난소가 붓고 배에 복수가 차는 난소과자극증후군에 노출될 수 있다. 난임 치료 과정에 나선 많은 여자들이 부작용을 경험하고 몸이 상한다.
페이스북과 애플의 사례처럼 난자 냉동 시술이 여성의 커리어 해방을 가져다줄 것처럼 비쳐지며 국내 난자 냉동 사례는 최근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해동 사례는 아직 드물다. 냉동된 난자를 이후에 얼마나 해동해 사용했는지에 대한 통계는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한 단계이다. 많게는 8%, 적게는 4~5%의 냉동 난자만이 해동된다.(과학동아 2019년 3월호, “20대 '신선한' 난자 얼리시겠습니까?”)
해동되지 않고 냉동 탱크 안에 남겨진 난자는 어떻게 될까? 안전하게 버려질 수 있을까? 생명윤리법의 조항들 대부분은 배아를 중심으로 규정하며, 정자와 난자 같은 다른 인체 유래물에 대한 조항이 미비하다. 현재 난자와 관련된 규정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의료기관의 재량에 따라 채취된 난자의 관리와 보관이 이루어지는 형편이다. 마땅한 규칙이 없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난자 냉동에서 더 나아가 난소 냉동, 자궁 이식 등 새로운 방식의 생식 기술 연구도 활발하다. 난자 냉동 대신 난소 조직 전체를 동결하는 방식도 있다. 분당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가임력보존센터는 2015년 7월 항암치료를 앞두고 난소를 동결해뒀던 34세 여성에게 동결보존돼 있던 난소를 복강 내에 이식하는 수술에 국내 최초로 성공했다.
스웨덴의 한 연구팀은 2013년 세계 최초로 자궁 이식에 성공하기도 했다. 또 2016년 연구에 따르면 자궁 이식을 받은 여성 11명 중 7명이 임신에 성공했다. 기증자는 대체로 엄마, 이모 등 출산 경험이 있는 친인척이다. 만약 딸이 엄마의 자궁을 이식받는다면 딸과 손녀가 아기 때 같은 집에서 자란 셈이다.
취재를 위해 '가임력보존센터'를 방문했을 때 한 병원의 인테리어 구조가 무척 독특했다. 벽이 곡선으로 구부러져 있어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모습을 보기 어려운 구조였다. 난임 치료를 받는 사람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아이를 갖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벽을 구부린 것이다.
간 김에 채혈을 통해 나의 난소 나이를 측정했다. 당시 만 27세였던 나의 난소 나이는 35세로, 남은 난자는 5만 개 이하로 추정됐다. 순간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챙겨야 할 자기 관리의 목록'에 나의 커리어, 몸, 정신 건강, 재테크와 함께 가임력까지 추가되었다.
애초에 질문을 다시 하고 싶어졌다. 가임력은 왜 보존되어야 할까. 지구와 동물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등 우리는 직접 낳은 자식 말고도 돌봐야 할 것이 많은데. 아이를 낳는 대신 피 묻은 이불을 빨며 자신과 주변을 돌보는 여자들이 지구의 미래에 더 적합한 사람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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