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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와 경계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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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확정할 때 ‘국가’ 단위에서 끝내곤 한다. 국가의 이익은 나의 이익과 비견되지만 국가 밖은 그렇지 않다. 세계를 신음하게 하는 기후위기는 아마 여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생각해보곤 한다.
한국만 봐도, ‘저출산이 경제성장 감소(국내총생산·GDP 하락)로 이어지니 아이를 더 낳아라’는 주장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1700년 고작 6억 명, 1900년 16억 명이었던 세계 인구가 현재 78억 명이며 2060년쯤엔 100억 명을 넘을 거라는 맥락에는 눈감는다. 전대미문의 인구 폭발은 기후위기와 큰 연관이 있는데 말이다.
전교 등수 매기듯, 국가 서열 경쟁을 부르는 GDP는 이젠 해악의 측면이 강해졌다. 산업화 이후 생산·소비 과잉과 각국의 규모경쟁을 채찍질해 온, 괴물 같은 방정식이다. GDP 산출 공식은 간단히 정리하면 ‘가계소비(기업소득)+기업투자+정부지출(정부의 소비와 투자)+순수출(수출-수입)’이다. 인구가 많을수록 아주 유리하며, 생산을 위해 내뿜는 오염과 생태계 파괴, 기후위기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지표로도 유명하다.
과학계는 제발 GDP를 버리라고 한다. 세계 153개국 과학자 1만1,000명은 2019년 과학학술지 ‘바이오사이언스’에 기후 파국을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인구 억제와 함께 GDP성장률을 대체할 경제 목표를 만들라는 요구가 포함됐다. “GDP성장과 풍요의 추구라는 (경제적) 목표를, 생태계를 유지하면서 기본적인 필요를 우선시하고 불평등을 감소시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쪽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GDP와 생태계, 불평등을 하나의 시퀀스에 넣은 것은 감동적이다. ‘지적 관성’에 매몰된 일부 경제학자들의 저출산 및 GDP 타령과 비교해보자면.
사실 심리적, 사회적 경계의 확장은 앎, 혹은 알고자 하는 자세와 관련이 깊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다시 뒤집어쓴 감옥 같은 부르카에 같이 몸이 떨리고, 무력감을 느끼고, 믿는 종교가 없는데도 기도를 하고 싶어진다면 자아의 확장이 ‘국가’의 저지선을 넘는 순간이다. 국내에 들어온 아프간 현지인들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대체로 마음을 연 것은, 한국 조력자라는 것 외에도 이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어느 국가보다 최근 많이 보도된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기존의 난민들을 대하던 자세와 비교해 보면 말이다. 알게 되어야 사랑(혹은 연민)한다는 건, 늘 맞진 않지만 대체로 맞다.
낙관할 순 없다. 우리 부(어젠다기획부)에서 ‘육식 줄이기 필요성’과 ‘난민 인정비율이 지나치게 낮은 문제’를 다룬 기사를 내보냈는데, 포털 댓글들은 ‘발작’을 일으키며 기자를 비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고기반찬을 줄였을 때 탄소배출 감소량과 같은 지식 자체도 거부하는 게 신기했다. 자기 이익(아마도 식욕)의 경계를 침범한다고 느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혹은 국가)의 이익을 지켜주는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육식 줄이기를 실행하며 기후위기를 늦추는 사람들, 그리고 자격이 되는 난민을 포용해 한국의 노동력 감소와 인권 침해 문제를 해결해 가는 사람들임을 알아야 한다. 밖으로의 애정과 관심을 최소화하고 자기 자신만 지키는 것이 언뜻 이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세상의 아이러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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