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히… 너무 아팠어, 나"

입력
2021.08.31 22:00

지난 1월 친구의 계부한테 성범죄 피해를 당한 뒤 5월 친구와 함께 세상을 등진 청주 여중생이 부모에게 남긴 편지. 마지막 말인 “내 빈 자리가 크지 않길 바래. 조용히 살고 싶어요. 너무 아팠어, 나”에서 숨이 멎는다. 연합뉴스


나이 열넷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이 소녀의 사연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한 줄도 나갈 수가 없다.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 생각과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생과 사의 갈림길 앞에서 써내려간 애틋하고 진솔한 이 육필 앞에서 그 어떤 필설이 소용 있으랴.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소녀의 마지막 편지. 편지지에 눈물이 번지면 부모 마음이 아플 테니 마음속으로만 눈물을 쏟았겠지. 5월의 봄밤을 꼬박 새우며 연애편지도 아닌 걸 수없이 쓰고 지우고 그랬겠지. 그러다 동이 터오는 창밖을 바라보곤 문득 안방 문을 열고 “엄마 아빠,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한참을 서 있었겠지. 그 모습이 자꾸 그려져 가슴이 먹먹해 온다.

그간의 고통과 슬픔과 자책, 자신의 빈 자리에 아파할 부모에 대한 미안함에 복받쳐서일까. 막상 그 사람에 대한 말은 ‘나쁜 사람은 벌 받아야 하잖아’ 한마디뿐이다. 또박또박 소녀다운 언어로 써내려간 생의 작별 편지, 나는 이보다 더 가슴을 후벼 파는 열네 살 소녀의 유서를 본 적이 없다. 더 쓸 말을 못 찾겠다.

“2007년에 태어나 14년 동안 제대로 된 효도 하나 못 해드려서 미안해요. 나 엄마 아빠 속 썩인 거 너무 많은데 가슴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나 부모님이 내 곁에서 위로해줘서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 나 너무 아팠어. 솔직하게 다 털어주면 좋았을 텐데 다 털어버리면 우리 엄마, 아빠 또 아플까 봐 미안해서 못 얘기했어요. … 마지막까지 못난 모습이야 주책없게. ○○의 하나뿐인 소중한 엄마 아빠여서 고마웠어. 미안해. 나 너무 아파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나 1월달에 있었던 안 좋은 일 꼭 좋게 해결됐으면 좋겠다. 나쁜 사람은 벌 받아야 하잖아. 그치? 나 그날만 생각하면 손이 막 엄청 떨리고 심장이 두근대.… 엄마가 나한테 하던 잔소리도 이제 못 듣고 아빠가 아침에 깨워주는 목소리도 못 듣는 거네. 너무 슬프다.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수고 많으셨어. 고운말 못 해서 미안해. 표현이 많이 서툰 딸이라.

우리 아빠 누구보다 많이 여려서 혼자 아파하실까 걱정된다. 난 아빠가 나 때문에 걱정 많이 하고 잠 못드는 거 싫어.… 울 엄마도 아프지 마셔, 걱정되니까. 오빠도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붙길. 박씨 패밀리 파이팅.

나는 그만 아프고 싶어서 혼자 이기적이어서 미안합니다. 불효녀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해요. 알지? …진짜 마지막으로 사랑합니다. 우리 가족들. 내 빈자리가 크지 않길 바래요. 예쁜 막내 ○○가 인사말이 길었네. 안녕히. 조용히 살고 싶어요. 너무 아팠어, 나.”

청주의 중학교 1학년인 소녀는 지난 1월 친구가 밤에 혼자 있는 게 무섭다고 해서 친구 집에 놀러갔다. 그 일은 야근을 한 그 친구의 계부가 집에 돌아온 후 터졌다. 부모의 신고로 수사를 개시한 경찰은 세 번이나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은 성폭행의 증거를 보완하라며 매번 반려했다. 그는 자신의 의붓딸한테도 성적학대를 해온 혐의도 받았다.

피의자가 구속되지 않고 있던 5월 12일 두 소녀는 나란히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아마도 서로 손을 꼭 잡았을 거다. 피의자는 이들이 숨진 지 13일 만에 구속됐다. 소녀의 유서는 100일이 막 지난 8월 22일 부모가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당신이 관심 있을만한 이슈

댓글 1,324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