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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와 언론중재법

입력
2021.08.31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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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윤호중(왼쪽)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기현(오른쪽)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박병석 국회의장과 언론중재법 상정 일정을 협의하기 위해 만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호중(왼쪽)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기현(오른쪽)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박병석 국회의장과 언론중재법 상정 일정을 협의하기 위해 만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여러 정부의 정책 중 역사교과서 국정화만큼 반대가 광범위하고 거셌던 사례도 드물다. 역사학회들, 대학 교수, 교육감, 학교 현장, 해외 한국학계까지 반대 성명을 냈다. 2015년 교육부 행정예고 후 의견수렴 기간에 반대만 쇄도하자 청와대는 당 조직을 동원했다. 찬성 의견 15만여 건(반대는 32만여 건)에는 조작된 이름, 주소가 상당수였다. 편찬기준·집필기준·집필진은 교과서가 완성될 때까지 비공개였다. 귀를 틀어막은 정부는 2017년 1월 국정 교과서를 냈다. 대단한 불통과 퇴행이었다.

□ 언론중재법 개정 과정이 그때를 연상시킨다. 언론계 현장부터 언론단체, 언론학계, 언론 탄압의 피해자였던 원로 언론인들, 해외 언론단체가 한결같이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쯤 되면 재고하는 게 마땅한데도 더불어민주당은 국회 상임위 통과까지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차이점이라면 국정 교과서가 오직 대통령 뜻만 받들어 정부가 폭주한 일인 반면 지금 민주당은 언론에 불만과 반감이 큰 강성 지지층을 등에 업고 있다는 점이다.

□ 일각에선 한 일간지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부녀 삽화를 엉뚱한 기사에 쓴 일을 들어 징벌적 손해배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언론의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국정 농단 의혹을 제기해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게 한 것이 언론이었고,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을 폭로한 것도 언론이었다. 권력의 압박을 버텨내고 편향된 대중의 항의를 무릅쓰고서 밝혀낸 진실들이다. 언론중재법이 있었다면 이런 보도가 불가능했을 것이란 우려가 빈말이 아니다.

□ 국가가 역사 편찬을 장악할 때의 문제는 기존 교과서의 어떤 결함보다 크다는 것이 당시 거대한 반대 여론의 핵심이었다. 지금 언론에 문제가 없다고 보는 이들은 없지만 언론중재법은 더 심각한 문제, 진짜 언론의 역할을 위축시킬 위험이 있다. 31일 여야가 전문가를 포함한 8인 협의체 구성에 합의하면서 언론중재법은 본회의 통과 직전 재논의될 기회를 얻었다.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로 폐기된 교과서 국정화 정책과는 다른 경로를 걷게 되길 바란다.

김희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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