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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하고도 나쁜 남자… 실제로는 수줍음 많던 양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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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양조위(량차오웨이)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을까.”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1일 개봉)을 보며 든 생각이다.
양조위가 연기한 웬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 ‘텐 링즈’에 기대 1,000년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인물이다. 탐욕에 젖었던 악인이면서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진 후 모든 것을 버린 순정남이기도 하다. 그는 무력을 행사해 아들 샹치(시무 류)를 집으로 불러들이면서도 따스한 부성을 드러낸다. 웬우가 냉혈한의 모습으로 일관하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보고 싶었다, 아들아, 집에 가자”라고 말할 때 순정하고도 나쁜 남자라는 모순적 캐릭터는 설득력을 얻는다. 동시에 영화에 대한 감정이입이 가능해진다. 분노와 슬픔과 냉혹과 연정이 깃든 양조위의 얼굴은 ‘샹치’가 제공하는 스펙터클 중 하나다. 60세를 눈앞에 두고 첫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양조위는 그렇게 자기 몫을 해낸다.
양조위를 처음 본 건 ‘비정성시’(1989)에서다. 당대 홍콩 배우들과 달리 빛이 약했다. 이어서 본 ‘첩혈가두’(1990)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하긴 한데 강렬한 인상은 아니었다. 담배를 꼬나문 것만으로도 호쾌한 이미지나 비장한 모습을 연출했던 주윤발(저우룬파)이나 유덕화(류더화)와는 달랐다.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장국영(장궈룽)과도 다른 결이었다. 판타지가 제거된, 우수 가득한 얼굴이었다. 액션 영화나 코미디 영화, 쿵후(功夫) 영화가 주류인 홍콩에서 ‘최고’ 수식을 얻긴 힘들어 보였다.
‘아비정전’(1990)에선 인상이 달라 보였다. 그는 영화 마지막에 잠깐 등장한다. 다락방같이 천장 낮은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연신 빗다가 돈뭉치를 주머니에 넣고 방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불량해서 잔상이 강했다.
그는 ‘아비정전’ 이후 왕가위(왕자웨이) 감독의 페르소나가 됐다. ‘동사서독’과 ‘중경삼림’(1994), ‘해피 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 ‘2046’(2004) ‘일대종사’(2013) 등 왕가위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다. 주로 말수 적은 고독한 인물을 맡았다. 고향에 두고 온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무사(동사서독), 여자친구와의 이별로 깊은 슬픔에 잠긴 경찰(중경삼림), 이국에서 사랑하는 남자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떠돌이(해피 투게더), 고향을 떠나 전통 무예 영춘권의 적통을 이어가는 무도인(일대종사) 등을 연기했다. 시대의 부침 속에서 침묵하며 삶을 살아내는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말없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관객이 깊은 우물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그이기에 가능한 역할들이었다. 특히 이웃 남자와 사랑에 빠진 아내 때문에 고뇌하다, 그 남자의 아내에게 연심을 품는 인물 모완(화양연화)은 양조위만이 가능한, 양조위를 위한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화양연화’로 2000년 칸국제영화제 최우수남자배우상을 받았다.
‘색, 계’(2007)에서 맡은 역할은 이전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는 1938년 일본이 점령했던 홍콩의 친일파 핵심인물 이를 연기했다. 자신과 사랑에 빠진 여인을 버려두고 줄행랑을 치던, 뼛속까지 악인이다. ‘샹치’의 나쁜 남자 이미지는 ‘색, 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양조위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 1990년대 한국에서 홍콩 영화가 한창 인기 있을 때 여느 홍콩 배우처럼 양조위는 출연작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고는 했다. 그는 매니저 등 수행원 없이 김포국제공항에 홀로 도착해 한국 영화사가 마련한 빡빡한 일정을 불평 한마디 없이 모두 수행했다고 한다.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화면보다 왜소하고 평범해 보였다. 흔히 말하는 ‘화면 잘 받는 사람’에 속했다. 푸른 트레이닝 상의를 입고 와서 그런지 스타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후배 부탁이라며 사인을 요청했을 때 그는 귀까지 빨개지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코미디 영화에 곧잘 출연하고, ‘지하정’(1986)에서 쾌활하면서 이기적인 바람둥이를 연기하기도 했던 인물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홍콩 영화 전성기 때 등장해 여전히 국제적 인지도를 유지하는 홍콩 배우는 양조위 정도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고 했던가. ‘샹치’를 보며 유약한 듯 강하고, 악한 듯 선량한, 양조위의 매력을 새삼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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