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의 축제, 바자

입력
2021.08.30 22:00

외교부 배우자회 자선바자회. 한국일보 자료사진


외교관 배우자로 해외에 거주할 때 주로 그림자 역할을 하다가 일 년에 한 번 주인공이 되는 활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터내셔널 바자다. 바자(bazaar)는 중동지역에서 시장(market)이라는 의미의 단어이고, 이것이 영어권에 와서 자선사업(charity)을 위해 물건을 파는 행사를 일컫게 되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각국 대사관의 배우자들이 자국의 특산품을 홍보, 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빈민구제 목적으로 기부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자가 국가 예산을 받는 공식 행사가 아니라 '민간인'인 배우자가 주도하고, △그 행사 참여가 강제적이지 않고 '자발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초부터 서서히 시작된 영국의 복지제도(연금, 국민보험)는 적극적인 국가개입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을 추구한다. 그러나 19세기는 아직 자유주의와 자유방임의 큰 영향하에 머물러 있었고, 최소한의 국가간섭 이외에는 개인이 스스로를 돕는 자조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산업혁명을 주도하여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의 모범이 되었던 영국은 몸이 불편한 빈민(빈민법)과 약자로 인식되던 여성과 아동 노동자들을 보호하였지만(공장법), 이것을 넘어 국가가 개입한다면 사람들의 독립심을 저해하게 된다고 간주했다.

국가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사람들을 어떤 제도로 강제하는 것을 꺼리는 전통이 강한 영국에서, 박애주의적인 선의를 가진 개인과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빈민구제와 사회복지 사업에 나서는 분위기가 대두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산업화와 더불어 노동자들의 질병, 빈곤 등 사회문제가 커지면서 영국 자산가뿐 아니라 중산층 시민들도 기부와 후원을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특히 대도시에서 다양한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 자선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당시 가장 유명한 것으로 1869년에 성립된 자선조직사회(Charity Organisation Society)가 있다. 지금도 영국의 거리를 다니다 보면 구세군(Salvation Army), 바나도스(Barnardo’s) 등 채리티 가게들이 눈에 많이 띈다.

외교관 배우자들의 인터내셔널 바자도 개인들이 스스로 빈민구제에 나서는 전통 속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겠다. 어느 나라가 더 많은 수익을 내고 더 기부를 할까라는 경쟁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각국의 문화를 홍보하는 축제의 의미도 크다. 영국에서 왕족의 일원이 바자 행사장에 등장하기도 하고, 브라질에서는 K팝 아이돌의 공연으로 이역만리의 땅에서 접하는 한류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고급 물품으로 홍삼을 많이 팔고, 한국 드라마 포스터로 벽을 장식한 부스에서 화장품을 팔 때면 고운 피부 비결을 사려는 손님들이 몰려든다.

바자가 끝나면 뿌듯하면서도 아쉬움이 남고, 심신이 녹초가 되면서도 일 년 뒤를 또 내다보게 된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기업의 사회복지 사업, 민간 자선단체의 불우이웃돕기 활동, 그리고 독지가의 후원과 기부가 확산되고 있다. 이런 움직임들이 모든 사회악을 제거하기에는 부족하고 정부 차원의 제도적인 개혁도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존재하는 자발적이고 박애주의적인 손길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해줌과 동시에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전통이 아닐 수 없다.



김윤정 ‘국경을 초월하는 수다’ 저자ㆍ독일 베를린자유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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