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이 처음? 46년 전 베트남 떠난 보트피플 3000여 명 부산서 품다

입력
2021.08.29 10:30
한국 찾은 난민 역사 되돌아 보니
1975년 베트남 보트피플 1,200여 명 국내에?
사상 첫 대규모 외국인 수용... 난민 신분은 아냐
보호소 세워 93년 폐소까지 3,000여 명 거쳐가
"인도적 차원.... 안보·반공의식 홍보 목적도"
1985년 보트피플 96명 구조한 전제용씨
고초 겪었지만 유엔의 '노벨상' 후보에 올라

한국 정부와 협력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이 24일 국내 이송을 위해 카불 공항에 도착한 한국 공군 수송기로 이동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연합뉴스

무장단체 탈레반이 다시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의 국민들이 사면초가에 빠졌습니다. 처형 등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탈레반 통치 아래서는 더는 살 수 없다고 아우성이지만, 국경이 차단되고 하늘길도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죠.

최근 BBC가 유엔난민기구(UNHCR) 자료 등을 토대로 분석한 아프간 내 난민을 대략 350만 명(전체 인구는 4,000만 명)으로 추정했는데요. 다른 국가들의 도움을 받게 된 극소수만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UNHCR에 따르면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기 이전인 올해 초부터 약 55만 명 이상의 난민이 이미 떠났다고 하네요.

희망을 찾아 목숨을 걸고 제3국으로 떠나는 이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국제사회는 큰 숙제를 받게 됐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죠. 정부는 주아프간 한국대사관이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에 근무하며 협력했던 검증된 아프간인 390명을 난민이 아닌 별도의 특별 체류 허가 방식으로 받아들였어요.

비록 이번 입국자들은 난민에 해당되지 않지만 당분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아프간 난민 문제는 주요 이슈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에도 난민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2018년 제주도로 입국한 예멘인 500여 명이 난민을 신청해 찬반 논란이 불거졌던 장면을 떠올릴 것 같은데요. 찾아보니 가난하고 헐벗어 우리 앞가림하기에도 벅찼던 1970년대에도 대규모 난민을 수용했던 적이 있었네요. 왜 그랬을까요?


1975년 베트남전 뒤 '보트피플' 부산에 와

베트남 난민 입국을 다룬 1975년 5월 22일 한국일보 지면.

시간은 한국전쟁의 참상을 이겨내려 먹고살기 급급했던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는 미국의 요청으로 한국도 참전한 베트남 전쟁이 급박하게 돌아갔던 때입니다. 한국이 편들었던 '자유 진영'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4월 공산권인 북베트남(월맹)에 함락되면서 패망하자, 작은 보트에 의지해 목숨을 걸고 조국을 떠나는 이른바 '보트피플(선상 난민)' 행렬이 이어집니다.

"사이공이 북베트남군에 의해 점령되기 한 달 전인 1975년 3월 말 남베트남 제3의 해항도시 다낭에 모였던 난민은 15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지금의 아프간만큼 긴급했을 겁니다.

파병됐던 우리 군도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와야 했겠죠. 5월 우리 해군의 상륙함(LST) 2정이 1,335명을 싣고 부산항으로 귀환합니다. 여기에는 베트남인이 무려 988명 포함됐습니다.

또 같은 달 사이공 남쪽 해상에서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던 남베트남 해군 상륙정을, 인근을 지나던 우리 화물선이 구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베트남 군인과 군무원, 그 가족 등 216명이 타고 있었다고 하네요. 이 화물선은 미군기지 대만 태국 등의 항구에 기항해 인계하려 했으나 모두 거절당한 뒤 정부의 허락을 받아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부산시와 대한적십자사는 옛 부산여고 건물에 임시 체류지를 만듭니다. 당시 난민보호에 관한 국제규약과 의정서에 조인하지 않은 우리 정부는 베트남 난민을 법적으로 난민이 아닌 '재난상륙자' 혹은 '무국적자'로 대우했다고 합니다. 난민 지위를 주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난민으로 인정하고 보호했던 것이죠.


그때도 난민 신분은 아냐... '재난상륙자' '무국적자' 신분

1977년 정부와 부산적십자사에서 유엔의 지원을 약속받고 해운대구 재송동에 세운 베트남 난민보호소. 부산시 블로그

이후에도 베트남 보트피플은 꾸준히 들어옵니다. 부산시 등에 따르면 종전 후 심각해진 식량난과 경제난에 허덕이던 베트남에서 보트피플이 크게 늘었고, 부산을 중심으로 국내에도 꾸준히 들어옵니다.

부산시에 베트남 난민이 빠르게 늘자, 정부와 부산적십자사는 77년 유엔의 지원을 받아 해운대구 재송동에 베트남난민보호소를 세웁니다. 재송동 보호소 개소 이후부터 89년 8월까지 입소한 난민이 36회에 걸쳐 1,382명(출생자 66명 포함, 2차 베트남 난민)이네요.

이들은 보호소에서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7년 가까이 살면서 93년 문 닫기 전까지 사망자 2명을 제외하고, 140차례에 걸쳐 모두 제3국에 정착했습니다. 부산 보호소를 거친 전체 난민은 약 3,000명이라고 합니다.

한국해양대 해양문제연구소 '부산 베트남 난민 18년사' 등 연구 자료에 따르면 75년 한국에 온 베트남 난민은 "한국이 역사상 처음이자 최대 규모로 외국인 난민을 구조하고 우리 사회 안으로 통합시키고 제3국으로의 이주를 알선했던 경험"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베트남전 참전 한국, '베트남 난민 책임져야' 국제 여론 높아"

목숨을 걸고 작은 보트에 몸을 실어 바다를 건너는 베트남 해상 난민 '보트피플'의 모습. 위키피디아

이면에는 더 깊은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어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 잘 알아,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베트남 난민 수용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도의적 차원만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우선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30만이 넘는 병력을 투입했던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관여한 국가들이 베트남 난민을 책임져야 한다'는, 동남아 국가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력에 뭔가 보여주어야만 했습니다.

또 베트남 난민의 해상 유출에 가장 큰 동기를 제공한 미국이 베트남전쟁 수행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난민 구호를 '국제 공조'라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처리하고자 결정했는데, 미국의 중요한 파트너였던 한국도 빠질 수 없었죠.

베트남 난민 수용은 냉전시대 체제 강화 및 선전 목적도 있었습니다. 반공의식, 총력안보, 국론통일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홍보 수단으로 활용됐다는데요.

1975년 '베트남 귀환 교포 및 난민구호 계획'에는 홍보 전략으로 "공산침략의 희생이 된 베트남 난민을 인도적으로 맞이하는 무드를 조성하며, 인도차이나 사태를 국론통일과 자주국방력 강화와 총화적 단결의 교훈으로 활용한다"는 문구도 담겼습니다. 베트남 난민들이 각종 궐기대회에 참가해 "공산주의는 가난과 배고픔, 죽음의 씨앗"이라고 강변했고, 반미 반정부 활동을 자제해줄 것을 호소하는 등 특수한 역할도 수행했다고 합니다.


"85년 망망대해에서 베트남 보트피플 96명 구해 제3국으로"

망망대해에서 베트남 난민을 구조했던 전제용씨가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베트남 난민을 만난다는 소식을 전한 한국일보 2006년 8월 30일 자 기사.

베트남 '보트피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극적 장면도 있었네요. 1985년 11월 14일 인도양에서 참치 조업을 끝내고 한국으로 귀항하던 원양어선 '광명 87호'가 남중국 공해에서 표류하던 베트남 난민 96명을 구조해 돌아온 겁니다. 선장 전제용씨가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베트남 난민을 발견했는데, 당시 선사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도 구조하지 말라고 지시했음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용단을 내린 겁니다.

이후 난민들은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지로 새 삶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는데, '광명 87호' 선원들은 이 일로 안기부 등 관련기관의 조사를 받느라 몇 달간 시달렸고, 전 선장은 결국 2년 넘게 배를 타지 못하는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2009년 국회 인권포럼(대표 황우여)이 시상하는 '올해의 인권상' 수상 당시 그는 "우선 난민들의 생명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혹시 발생할지 모를 불이익을 각오하고 내린 결정에 지금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래도 난민들은 생명의 은인인 전씨를 '캡틴'으로 부르며 편지 등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고, 2006년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해 상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유엔의 노벨상인 '난센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습니다. 2019년, 전 선장이 운명을 달리했을 때도 미국에서 비보를 접한 베트남인들은 한인들과 함께 추도식을 엄수하며 마지막까지 그를 배웅했습니다.


원양어선 선장으로 1985년 남중국해에서 베트남 보트피플 96명을 구한 공로로 2009년 국회 인권포럼(대표 황우여)이 시상하는 '올해의 인권상'을 받은 고(故) 전제용씨. 경남 통영시 미수동의 자택에서 자신이 구했던 베트남 난민들이 감사의 표시로 보내온 사진이나 감사패를 배경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통영=연합뉴스


난민인정률 1.5%... "정부·시민사회, 인식·제도 개선 나서야"

2018년 6월 제주시 일도1동 제주이주민센터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주 예멘 난민신청자들을 대상으로 인권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뉴시스

이처럼 갈 곳 없는 이방인을 포용했던 한국은 1992년 유엔난민협약에 가입했고, 2013년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합니다. 유엔이 인정한 난민수용국도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뿐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2018년 내전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예멘인 약 500명이 제주도에 무비자로 입국해 난민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며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였던 당시 무슬림에 대한 선입견이나 사회 안전을 우려한 시민들의 반대 여론이 훨씬 높았죠.

이번 아프간인 국내 이송 때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마땅히 받아들이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더 이상 무슬림 난민을 데려오지 말라" "신원이 확실한지 의문스럽다" 등 반대 의견도 상당했습니다. 난민에 대한 인식이 3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겁니다.

이 때문인가요. 난민 인정률도 매우 낮습니다. 국내난민현황을 모니터링하는 난민인권센터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정부 자료에 따르면 1994년부터 지난해까지 난민을 신청한 7만1,042건 중 난민 인정률은 1.5%(1,084명)에 불과합니다.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제도를 갖췄지만, 여러 사회 문제를 우려해 엄격한 심사 기준을 적용했던 탓입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진정한 선진국의 기준 중 하나는 '세계 시민주의'에 있다"며 "여전히 외국인에 차별적인 인식 전환과 제도 개선에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숙제를 던져줬다"고 말했습니다.

박민식 기자
박서영 데이터분석가
그때 그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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