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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아기 '리치'와 '김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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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미 수송기 C-17에 몸을 실은 만삭의 아프간 여성이 진통을 시작한 건 비행 도중이었다. 고도가 높아지고 기압이 떨어지며 통증은 심해졌다. 수송기가 독일 람슈타인 공군기지에 착륙하자 의료진이 달려가 병원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아기가 막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수송기 화물칸 안에서 새 생명이 태어났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한 걸 확인한 간호사는 엄마가 첫 수유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부모는 아기의 이름을 C-17의 콜사인을 본떠 ‘리치’(Reach)로 지었다. 콜사인은 조종사가 관제소와 교신할 때 쓰는 항공기 호출 코드명이다. 리치 외에도 최소 2명이 착륙 후 태어났다.
□ 아프간의 수도 카불 공항 담장 철조망 위로 아기를 건네는 장면도 오래된 기억을 소환했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 담장에 다다른 아빠는 철조망 사이로 미군이 보이자 돌을 갓 넘긴 듯한 아기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렇게 ‘아이만이라도 살려달라’는 애절한 눈빛과 함께 담장으로 넘겨진 생명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사진 속 아기는 아빠와 재회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가 더 많다.
□ 70여 년 전엔 우리가 그랬다. 1950년 12월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나온 미 제10군단은 원산이 막히자 해상 철수 작전을 편다. 미군은 당초 무기와 장비만 수송하려 했지만 국군의 설득과 부두로 밀려든 30만 명의 피란민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자유를 향한 대탈출엔 상선들과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도 동원됐다. 그러나 남쪽으로 가는 배에 올라탄 이는 9만여 명에 그쳤다.
□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사흘 후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하기까지 배에선 5명이 태어났다. 선원들은 ‘김치원(1)’부터 ‘김치파이브(5)’까지 이름을 붙였다. 외신은 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전했다. 이들 중 한 명은 장승포가축병원장이 됐다. 당시 이 배에 함께 탄 1만4,000여 명의 피란민이 낳은 아이 중엔 문재인 대통령도 있다. 한국에 온 아프간인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야 할 이유는 너무 많다. 어쩌면 그들은 바로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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