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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묶어 세우고 기관총으로…” 간토 학살, 한일 시민들이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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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쓰기역 근처에서 도망치는 조선인에게 쇠갈고리로 습격하는 것을 봤다. 아야세 강 하천 부지에선 12, 13명가량의 조선인들을 뒷짐 지게 하고 줄줄이 묶어 강을 향해 세우고, 이쪽 둑 위에서 기관총으로 쏘았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에겐 흥분한 병정이 칼로 덤벼들었다.”
“요쓰기 다리 근처에서 자경단이나 구경꾼이 ‘이놈이 독약을 내던졌다’라고 외쳤다. 몸이 칭칭 묶인 중년의 조선 여자가 팔다리가 짓눌린 채 트럭에 치였다. 아직 손발이 움직이자 ‘야, 아직 움직이고 있다, 다시 한번’ 하며 트럭으로 다시 치어 죽였다.”
지난 24일 화요일 저녁. 화상회의 프로그램으로 연결된 한국과 일본 각지의 시민 7명은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기록을 일본어와 한국어로 차례로 읽었다. 니시자키 마사오(62)씨가 2016년 발간한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기록’을 읽고 한국어로 번역하는 세미나가 7월 중순부터 매주 화요일 밤 열리고 있다. 일반사단법인 ‘봉선화’ 이사를 맡고 있는 니시자키씨는 일본 각지의 도서관을 돌며 공문서와 일기 등을 샅샅이 훑고, 증언 1,100가지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 화요 세미나를 운영하는 김종수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대표는 “원저자, 출판사와 논의를 거쳐 한국어판 출간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 대표는 지난 3월 간토 학살 피해자의 실제 생애를 다룬 책 ‘엿장수 구학영’이란 책도 펴낸 바 있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 직후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에서 숨진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기록이나 연구자마다 달라 이견이 크다.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였던 독립신문 조사에서는 6,661명이 사망했다고 추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100년 전 일이라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 사안에 비해 한국인에게조차 구체적인 내용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떠돌도록 조장하고 주민을 선동, 일본군과 자경단원들이 조선인들을 죽창으로 학살했다는 골자만 들어 알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이 번역 세미나를 하고 있는 이유 역시 역사의 진실을 더 널리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시모노세키에 거주하는 구와노 야스오(73)씨는 “1986년 근무하던 회사가 폐업해 정리하던 중에 오래된 극비 서류를 발견했는데, 대지진 당시인 9월 3일 조선인 학살 내용의 무선 전보를 손으로 받아 적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조선인 학살이 가장 심했는데도 일본인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학살 같은 것에 주목하고 조선인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기무라 히데토(77)씨는 “한국 사람도 듣고 있는데 학살의 증언을 읽다 보면 일본인으로서 미안하다”면서 “이 나이가 돼서야 사실을 알게 돼 민망하지만, 반드시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고야에서 활동하는 이두희(50)씨는 “이렇게 다양한 증언이 있는데도 부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일본인뿐 아니라 한국인들도 많이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간토 학살에 대해선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이 이뤄진 적이 없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특별법이 발의됐으나 회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김 대표는 “재일 사학자와 뜻 있는 일본인 학자는 간토학살을 연구했고 일본변호사협회는 2003년 고이즈미 총리 앞으로 ‘진상 규명과 사죄’를 요구했다”면서 “고이케 유리코 이전의 도쿄도지사들은 매년 추도문을 보내기도 했는데, 정작 한국 정부는 추도문을 보낸 적도, 진상 규명을 시도한 적도 없다”며 한국의 무관심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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