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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시대에 코미디가 필요한 이유

입력
2021.08.27 04:30
20면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 월간 공연전산망 편집장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사나이(가운데)는 샛별다방 사람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가 남기고 간 것은 꿈일까, 망상일까. 공연은 다음 달 26일까지 서울 동숭동 대학로티오엠.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사나이(가운데)는 샛별다방 사람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가 남기고 간 것은 꿈일까, 망상일까. 공연은 다음 달 26일까지 서울 동숭동 대학로티오엠.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몇 달만 버티면 벗어날 줄 알았던 팬데믹 상황이 2년째로 접어들었다. 백신 접종률은 올라가고 있지만 언제 팬데믹이 끝날지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시대가 안정된 시기에는 비극이 성행하지만 시대가 불안하고 우울할 때는 코미디가 인기를 끈다. 일상이 우울한데 공연장에 가서까지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비록 현실 도피라고 할지라도 이를 통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우울한 현실에 맞설 힘을 얻는다면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휴식이다. 대중예술을 긍정하는 이들은 대중예술의 휴식 기능을 높게 평가한다. 팬데믹 시대에 즐기기에 적당한 뮤지컬 코미디 '홀연했던 사나이'가 공연 중이다.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 앞에 좌절하던 승돌은 영화감독의 꿈을 갖게 했던 열 살 때로 돌아간다. 승돌의 엄마가 운영하는 옛날 다방, 엄마를 짝사랑하는 전교조 출신 교사인 황태일, 가족들 뒷바라지에 학업도 꿈도 키우지 못하고 다방 종업원으로 일하는 김꽃님, 그런 꽃님이를 좋아하는 배달원 고만태가 단골로 상주하는 샛별다방에 홀연히 한 사나이가 나타난다. 허세 가득한 포즈로 누가 봐도 사기꾼 같은 사나이는 자신을 영화감독이라고 소개하며 다방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몸은 열 살이지만 정신은 성인 그대로인 승돌이는 홀연했던 사나이의 정체를 밝히고 엄마를 비롯한 다방 사람들을 마수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열 살 꼬마는 이성보다도 강한 백 원짜리 동전의 본능적인 유혹에 번번이 굴복하고 만다.

사나이는 샛별다방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쓰겠다며 더욱 노골적이고 뻔뻔하게 사소한 편의를 요구한다. 지하 다방의 낮게 깔리는 무거운 공기처럼 우울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젖어 살던 다방 사람들은 모처럼의 활기를 되찾는다. 사나이는 충분히 얻을 것들을 얻고 나자 서서히 다른 다방으로 터를 옮기려고 하지만, 지겨운 현실을 잊게 해주는 사나이의 달콤한 환상에 취한 다방 사람들은 홀연했던 사나이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다방 사람들이 사나이의 정체를 몰랐다기보다는 모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가 정말 영화감독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 꿈꿀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조금은 진지한 메시지를 다루고 있지만 그런 메시지는 신경도 쓰고 싶지 않을 만큼 허풍과 허세와 과장으로 점철된 코미디가 극을 유쾌하게 이끈다.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자칫 과도한 유머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마치 옛날 코미디 영화나 만담을 보는 듯한 레트로 감성 충만한 정서나, 오세혁 작가의 캐릭터와 적절히 어울리는 찰진 코믹 대사에 꽂힌다면 '홀연했던 사나이' 마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

승돌이는 홀연히 나타난 사나이의 영향에서 벗어나 영화감독의 꿈을 포기할까. 아마도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사나이는 승돌이에게 허세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허세를 부린 거지, 허풍을 떤 건 아니란다." 허세가 기세가 되어 꿈으로 나갈 길을 찾아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승돌이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 안에 묻어놓았던 소중한 꿈을 일깨워주었던 허세 강한 사나이를 보면서 오히려 꿈을 더욱 단단하게 키워갔을 것이다. 홀연히 찾아왔던 사나이는 홀연히 사라진다. 현실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꽁꽁 숨겨둔 꿈들을 잠시나마 상기시키고 답답한 일상에 균열을 낸 이 사나이가 그 어느 곳도 아닌 각자에게서 온 건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홀연하게 올 수 있고 홀연히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초연 공연에서는 사나이의 모호성을 강조하면서 관념을 캐릭터화한 유형처럼 느껴지게 했다. 재연 공연에서는 선한 영향을 끼치지만 사기꾼이 분명한 인물로 현실성을 더했다. 그럼에도 이 사나이가 현실과 환상 경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팬데믹 상황에 이 사나이가 홀연히 나타나 허세 '쩌는' 말들로 움츠렸던 꿈들에 기지개를 켜게 해줄 수 있다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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