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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이~' 이어 '짤랑' 소리도 안녕…사라진 버스의 옛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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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계시면 오라이~"를 '승차입니다', '환승입니다'가 대신한 지 꽤 흘렀습니다. 4050세대가 버스 하면 떠올리는 옛 소리는 이제 기계음이 대신하고 있죠. 그래도 버스의 정겨운 소리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요금함에 든 동전이 내는 짤랑거리는 소리죠. 예전엔 요금함이 가득 차 묵직한 소리를 냈다면, 이젠 현금이 얼마 들어 있지 않다 보니 동전 튀는 소리를 많이 내게 됐죠.
그런데 마지막 남은 버스의 추억인 동전 소리도 곧 사라질 것 같습니다. 서울시가 버스 요금함을 없애기로 결정했기 때문인데요. 10월부터 시범 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이미 승객의 99%가 버스카드를 찍고 타고 내리기 때문에 요금함은 이젠 추억의 페이지에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서울시는 10월부터 시내버스 2개 회사 8개 노선 171대 버스에서 현금 요금함을 시범적으로 없애겠다고 발표했는데요. 전면 시행 여부는 시범 사업을 해본 뒤 내년 3월에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서울시가 요금함을 없애기로 한 건 사실상 현금을 쓰는 이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2010년 5%였던 현금 이용객 비중은 2019년 1%로 내려갔고, 지난해에는 0.8%까지 떨어졌습니다. 5년 뒤에는 0.1%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게 서울시의 예상인데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위생이 중요해진 점도 한몫했습니다.
버스 기사들은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잔돈을 내주려고 단말기를 조작하거나, 1만 원권이나 5만 원권을 들고 타는 승객과 시비가 붙는 등 안전사고 우려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죠. 손님 잔돈 처리 업무를 덜게 돼 운전에 집중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고요.
현금마저 사라지면 버스에 대한 아련한 추억은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버스 하면 떠오르는 옛 풍경 중 하나가 '버스안내양(원)'으로 불린 버스 차장이 있죠. 지금 보면 참 희한한 이름인데요. 버스안내양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큰 인기를 끌었을 만큼, 중·장년층에게는 과거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함께했던 추억의 인물입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있던 버스안내양, '여차장'은 1961년 6월 버스운송사업법에 따라 의무화됐습니다. 당시 법에 '여객운수시설에 안내원을 승차하게 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가면서 모든 버스에 안내양이 타게 됩니다.
당시 버스 기사들에게 안내양은 참 고마운 존재였는데요. 한국일보는 2004년 9월 3일 자 '버스의 추억'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안내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한 버스 기사의 인터뷰를 담았는데요. 1970·80년대는 승객으로 빽빽이 가득 차 '콩나물 버스'로 불린 시기라 버스에 무사히 타는 것은 모두의 숙제였는데요. 여차장은 이를 도와준 최고의 파트너였죠.
당시 인터뷰에 응했던 버스 기사는 "그때는 승객이 얼마나 많은지 차장이 아무리 밀어도 안 되는 거야. 그럼 어린 친구가 길바닥에 앉아 울어요. 그때면 저도 나가 사람들을 밀어 넣곤 했지"라고 말했습니다. 또 "힘든 몸이지만 아저씨들 도와준다고 틈나는 대로 버스 청소까지 해주던 고마운 안내양들이 보고 싶다"고 회상했습니다.
하지만 버스안내양은 어린 나이에 온갖 고충을 겪어야 했는데요. 한국일보 1974년 5월 25일 자에 실린 기사에는 버스안내양의 고달픈 삶이 적혀 있습니다. 스무 살도 안 되는 나이에 하루 18시간 가까이 근무에 시달려야 했고, 평균 1만5,000원 수준의 낮은 임금을 받아야 했죠.
모욕을 당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출퇴근길 만원 버스를 타 짜증이 난 승객으로부터 갖가지 욕설을 들어야 했고, 요금을 다뤄야 하는 탓에 버스회사 계수원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수입이 적은 날에는 '돈을 빼돌린 거 아니냐'며 몸수색을 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정부는 1981년 2월 버스안내양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계수기를 3개월 동안 잠정 철거하기로 합니다. 또 안내양들이 사용하는 기숙사와 식당, 욕실 등 후생 복지 시설을 점검하며 기준에 미달하는 업체에는 개선 명령을 했죠.
버스안내양을 퇴폐적으로 묘사한 영화가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요. 1981년 12월 영화 '도시로 간 처녀'가 개봉됐는데, 한국노총은 안내양과 버스 기사의 인권을 침해한 영화라며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비난 여론이 들끓자 영화는 개봉한 지 11일 만에 내리게 됐죠.
1984년 8월에는 업체로부터 사표를 강요당한 안내양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며 안내양 인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경기 남양주군에 위치한 시내버스 업체 창진상운에서 근무하던 안내양 장모씨가 숨졌는데요. 장씨의 동료들은 전날 밤 장씨가 숙소에서 '낮에 승객과 싸웠다'며 괴로워했다고 전합니다. 장씨는 이튿날 오전 일을 그만두라는 회사의 요구에 사표를 쓴 뒤 기숙사를 뛰쳐나갔고, 이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일주일 뒤 창진상운 사장 박모씨는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노동부는 근로 감독을 실시합니다. 감독 결과 업체는 주 80~86시간 근무를 시키며 안내양들을 혹사시켰고, 6일 연속 근무도 강요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차비 횡령, 이른바 '삥땅 방지'를 이유로 안내양의 몸수색을 하는 등 인권 유린이 잦았죠.
열악한 노동 환경과 인권 문제, 산업화 영향으로 공장으로 향하는 여성이 늘면서 운송업체들은 안내양 구하기에 비상이 걸립니다. 정부는 업체들의 아우성에 출퇴근 시간 외에는 안내양이 버스에 타지 않아도 된다는 대책을 내놓기도 했죠.
이와 맞물려 1982년 '시민자율버스 운행제'가 도입되면서 안내양은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정류장 자동 안내 방송, 하차 벨, 자동문 시스템이 도입됐고, 앞문 승차, 뒷문 하차, 요금 선불제 등 버스 승·하차 방식이 완전히 바뀌면서 안내양이 더는 필요 없게 됐죠. 그해 12월에는 자동차운수법의 차장제 의무 조항이 삭제되면서 안내양 제도는 폐지됩니다.
버스의 추억이라고 하면 안내양 못지않게 토큰과 회수권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요. 서울시는 1977년 12월 토큰을 도입하는데, 현금을 낸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내주는 수고를 덜 수 있고, 운송업체는 토큰 요금을 선불로 받게 돼 이득이었죠. 안내양을 위해 도입한 제도는 아니었지만, 삥땅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승객과 불필요한 싸움을 안 해도 됐죠.
하지만 토큰은 생각하지 못했던 부작용을 낳았고, 승객들의 불만도 컸는데요. 버스 요금 인상 시 차비 인상 차익을 노린 투기 수단으로 악용됐고, 제조 단가가 만만치 않다는 것도 부담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일보 독자 투고란에는 버스 토큰에 대한 애로 사항이 꽤 많이 접수됐는데요. 토큰을 파는 곳이 많지 않아 불편하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학생용 토큰을 내는 '얌체 성인'을 꼬집는 글도 많았습니다.
토큰은 당시 황색과 백색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성인용, 다른 하나는 학생용이었습니다. 요금 인상 때마다 학생용과 성인용의 색상을 번갈아 바꿨다고 하는데요. 일부가 이 같은 빈틈을 이용해 학생 요금을 냈던 겁니다. 또 도로에 놓인 토큰 판매소가 도시 미관을 해치고 통행에 불편을 준다는 불만도 많았죠.
학창 시절 필수품이었던 회수권에 대한 추억도 많을 법한데요. 당시 10장 묶음의 회수권을 절묘하게 11장으로 만드는 기술을 가진 학생이 많았죠. 한 장 더 얻은 회수권은 학교 앞 분식점에서 빵과 떡볶이로 바꿔 먹는 데 쓰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친구'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선 에피소드로 소개됐죠.
생김새가 비슷한 껌 포장지를 회수권 대신 사용하는 학생도 있었고, 황색 토큰과 생김새가 비슷한 10원짜리 동전을 기사 몰래 내는 승객도 있었죠. 하지만 1994년 12월 충전식 버스카드가 도입되면서 회수권과 토큰 역시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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