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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컵라면엔 수프봉지가 없었다...다시 없앨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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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를 사지 않을 권리] <18> 라면 수프봉지
상품의 발달은 지금까지 '포장 쓰레기'의 비대화를 동반해 왔다. 과한 겉모양을 때로 '고급화'라고 칭하면서. 기후위기의 현실 속에 놓인 지금, 과거를 돌아보면 그때의 단출한 포장이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온다.
요즘 컵라면의 뚜껑을 열면 수프봉지가 들어있는 게 당연해보이지만, 사실 이는 옛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원조 컵라면에는 봉지 없이 분말수프와 건더기수프가 그대로 컵에 담겨있었다. 해외 컵라면 중 일부는 지금도 이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익숙해서 몰랐을 뿐, 수프봉지가 꼭 필요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수프봉지는 재활용이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지구를 위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없애는 것은 어떨까.
오뚜기의 진라면 컵라면을 뜯어봤다. 면발과 함께 들어있는 분말수프 봉지가 보인다. 대부분의 컵라면은 건더기수프가 면과 함께 들어있어 수프봉지는 분말수프 하나지만, 일부 컵라면에는 건더기에 별첨 유성수프까지 따로 들어있다. 컵라면 하나에서 수프봉지 쓰레기가 3개 나오는 것이다. 오뚜기 참깨라면 컵이 그 예다.
해외 제품으로 눈을 돌리면 컵라면의 기본 구성이 사뭇 달라진다. 일본 닛신의 컵누들을 까봤다. 컵 안에 수프봉지가 없다. 쓰레기가 줄어들었다.
사실 우리나라 컵라면도 처음에는 수프봉지가 없었다. 컵라면의 원조인 저 닛신 제품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수프봉지가 따로 들어있는 형태로 바뀌었다. 오뚜기 관계자는 그 이유에 대해 “분말수프를 직접 투입하는 경우 수프가 습기로 인해 굳어질 수 있고, 제품 개봉 시 지저분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습기나 모양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 닛신 컵라면을 열었을 때 수프가 굳어있다거나, 지저분해 보이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임종환 경희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는 “컵라면에 미리 분말수프를 뿌려놓더라도 소비만 빨리 된다면 괜찮다”고 설명한다. 유통과 소비가 빠른 도시 지역에서는 수프봉지를 덜어낸 컵라면도 품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인구가 적고 유통이 느린 시골 등에는 품질에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박상규 남부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도 있었다.
다만 컵라면 겉을 싸고 있는 투명 비닐은 없애기 어렵다고 한다. “유통 과정에서 제품 파손 및 벌레 유입을 막기 위해서”라는 게 컵라면 생산업체들의 공통된 답변이다. 컵라면 뚜껑에는 식용접착제를 사용하는데, 접착력이 약해서 유통 중 뜯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컵라면에서 화랑곡나방애벌레로 추정되는 유충이 발견된 적이 있다(관련기사). 해외에서도 컵라면에는 비닐을 한겹 더 씌우는 추세다. 투명비닐의 재질은 폴리프로필렌(PP)으로 비닐류 재활용이 가능하다.
‘작은 라면수프 봉지 하나 줄어든 게 뭐 그리 중요할까?’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수프봉지는 분리배출 표시가 붙어 있는 데도 재활용이 어렵다. 특히 수프가루에는 염분이 있어서, 태웠을 때 유독가스가 나오기 때문에 더욱 처치 곤란이다.
우선 분말수프의 경우 대부분 복합 재질인 ‘아더(other)’ 비닐로 만든다. 습기 차단을 위해서다. 아더 재질은 비닐로 다른 비닐을 만드는 등의 ‘물질재활용’은 안 된다.
고형연료(SRF) 등을 만드는 에너지 재활용만 가능한데, 이것도 비닐이 깨끗할 때 얘기다. 봉지에 수프가루가 남아있으면 그 염분 때문에 염소농도가 높아져 유독가스가 발생한다. 발전시설을 부식시킬 위험도 있다.
결국 재활용이 가능하려면 수프봉지까지 깨끗이 씻어서 버려야 한다. 하지만 밖에서 주로 먹는 컵라면의 특성상 소비자가 이를 지키는 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소비자가 이렇게 노력해서 에너지 재활용이 가능해지더라도, SRF 제조시 온실가스 배출은 불가피하다. 환경을 위해서라면 비닐이 없는 게 최선이다.
봉지라면 역시 옛날 제품이 더 친환경적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에는 수프봉지가 단 하나였다. 지금도 수프봉지가 단 한 개인 라면이 시중에 팔리고 있다. 농심의 안성탕면, 오뚜기의 오라면ㆍ스낵면, 삼양의 쇠고기면ㆍ된장라면 등이다. 이 제품들은 분말수프와 건더기수프가 같이 들어있는 형태로 팔린다.
그렇다면 다른 제품 역시 분말과 건더기수프를 하나로 합쳐서 판매해도 되지 않을까. 제조사들은 분말수프와 건더기수프의 입자와 부피 차이로 한번에 포장할 경우 품질 유지가 어렵다고 답변했다. 분말수프가 따로 있어야 나트륨양을 조절할 수 있다는 답변도 공통됐다.
농심 관계자는 “파나 청경채 등 모서리가 날카로운 원료의 건더기를 분말수프와 함께 포장할 경우 포장에 구멍이 생기거나 찢어져 유통과정 중 변질될 수 있고, 버섯의 경우 분말수프랑 같이 넣었을 때 색이 물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 안성탕면의 수프는 왜 건더기와 분말을 하나로 합친 걸까. “안성탕면에 건더기로 들어가는 미역이 색이 진해 물이 들 염려도 없고 염분에 의한 맛 변화도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문가들도 비슷한 설명이다. 박상규 교수는 “건더기에 비해 분말수프는 수분을 3~4% 정도 함유하고 있는 데다 염분도 있어서 삼투압의 작용으로 각각의 맛이 섞일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한다.
혹시 모르지만 구멍이 뚫릴 가능성, 맛이 섞일 가능성, 버섯이 물들 가능성. 이 정도의 문제로 반드시 수프봉지를 따로따로 유지해야 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다.
단순히 품질 보존 외에도 ‘제품 고급화’가 수프 개수 증가에 영향을 줬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라면의 고급화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수프를 넣으면서 봉지 수가 늘었다”며 “옛날보다 건더기를 예쁜 모양의, 가급적 신선한 모습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도 중시된다”고 말했다.
라면 업체들도 같은 설명이다. 팔도 관계자는 “라면 제품의 콘셉트에 따라서 프리미엄 라인일 경우 분말수프를 더 추가할 수도 있고 기타 다른 수프를 넣을 수도 있다”고 답했다.
실제 라면의 가격은 수프 개수가 늘어날수록 비싼 경향이 있다. 편의점 판매 기준으로 수프가 한 개 들어간 농심 안성탕면은 개당 800원, 오뚜기 스낵면은 750원이다. 수프가 두 개인 오뚜기 진라면은 820원, 농심 신라면은 900원으로 조금 더 비싸다.
수프가 3개 들어간 신라면 블랙은 무려 1개에 1,700원이다. 신라면 블랙은 농심에서 ‘신라면의 고급화’를 모토로 출시한 라면으로 건더기ㆍ분말수프 외에 추가로 넣는 별첨 수프가 있다. 세 가지 수프봉지의 재질은 모두 아더로 물질재활용이 어렵다.
업체들도 수프 개수와 가격의 상관관계를 인정한다. 삼양 관계자는 “수프가 한 개인 제품의 경우 두 개 이상인 제품에 비해 원료나 포장지 등이 덜 사용되기 때문에 가격도 저렴한 편”이라고 말했다. 다만 “수프가 하나여도 수프 양이 많거나 액상일 경우 더 비싼 경우도 있다”(팔도)고 한다.
겉비닐, 수프봉지 3개, 여기에 묶음포장(재포장) 비닐까지 합하면, 라면 한 개를 끓여먹으면서 나오는 비닐쓰레기는 많게는 5종류나 된다. 이 중 제대로 정부 규제를 받는 건 없다.
환경부는 올해 4월부터 세제ㆍ우유ㆍ식용유 등의 묶음 상품(3개이하)의 비닐 재포장을 금지했다. 하지만 라면 묶음은 재포장 규제에서 빠졌다. 농심에서 최근 생생우동의 묶음포장 비닐을 띠지(밴드)로 바꾸긴 했지만, 다른 라면들의 비닐 포장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관련기사: 띠지묶음 라면 첫 등장…업계 비닐 줄이기 확산될까 )
수프봉지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가 적용되는 분리배출 대상이다. 라면업체들은 수프봉지를 생산할수록 분담금을 내야 하지만 그 금액은 1㎏당 400원꼴이다. 라면 1개 무게가 약 120g인 것에 비하면 라면 비닐에 대한 부담은 매우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컵라면의 수프봉지를 없애고, 봉지라면의 수프들을 합치는 방법은 업계가 당장 할 수 있는 폐기물 줄이기 방법이다. 그러나 기업들의 인식은 뒤처져 있는 게 현실이다.
다행히 새로운 포장재 개발을 통한 라면포장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움직임도 있다. 바로 ‘먹을 수 있는 포장재’ 개발이다.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연구되는 분야다. 녹말이나 단백질을 가공한 포장재에 뜨거운 물을 뿌리거나 끓일 경우 그대로 녹아 식품의 일부가 되는 원리다.
실제 라면에 이를 적용한 사례도 있다. 2019년 영국의 대학원생 홀리 그라운즈(Holly Grounds)는 감자전분과 글리세린을 이용한 라면 포장재를 개발했다. 건더기와 면이 담긴 이 포장에 물을 부으면 포장이 녹아 수프 역할까지 한다. 이 제품은 그해 영국 버추얼 디자인 페스티벌 뉴 디자이너 부문 우수 프로젝트로 선정됐다. 그라운즈는 “10분 안에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이 분해되는 데 수백 년이 걸리는 포장재에 담겨 판매되는 게 모순된다고 생각했다”며 개발 이유를 밝혔다. 국내에서도 충남대 연구진이 콩과 홍조류 등 다양한 식품을 이용한 가식성 포장재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임종환 교수는 “가식성 포장재를 이용해서 라면 수프를 포장한다면 비닐쓰레기도 줄이고 위생상 문제도 없다”며 “라면뿐 아니라 커피ㆍ분유 등을 1회 사용량씩 판매할 때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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