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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몽(夢), 다른 꿈... 소설 홍루몽과 시진핑의 중국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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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일본인 작가가 베이징에 사진관을 열었다. 고궁 동쪽, 지금의 왕푸징 부근이다. 사찰, 석굴, 궁전, 능원, 거리 등을 촬영했다. 사진도 팔았다. 루쉰은 어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1923년 베이징 고궁 서쪽에 살던 루쉰이 사진 한 장을 샀다. ‘동방미신(東方美神)’이라 경탄하고 액자까지 만들었다. 20세기 최고 문학가이자 사상가의 ‘아름다운 신’에 대한 극찬이다. 서재에 두고 1936년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감상했다. 미인이 아니니 사람이 아니다. 도대체 누구일까?
허베이성 수도 스자좡 북쪽 30분 거리에 위치한 정딩(正定)으로 간다. 청나라 강희제의 어필인 칙건융흥사(?建隆興寺)를 금빛으로 새긴 천왕전이 나타난다. 표를 검사하는 입구다. 10대 명찰에 빠지지 않는 사찰인데 산문이 없다. 십육국 시대 선비족이 세운 후연(384~407)의 마지막 황제 모용희의 사택인 용천원(龍騰苑)이었다. 수나라 개국 황제 양견이 사원을 짓고 용장사(龍藏寺)라 했다. 당나라 시대 융흥사로 이름을 바꾸고 중건했다. 태종 이세민의 공신인 울지공이 책임자였다. 수도에 급작스러운 변고가 발생해 산문을 미처 짓지 못했다.
현재의 융흥사 목조건축은 대부분 북송 시대 양식이다. 천왕전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1052년 건축된 마니전(摩尼殿)이 먼저 나온다. 가로 7칸, 세로 6칸 규모다. 흔히 보던 건축물과 다소 차이가 있다. 분명 이중 처마인데 단순하지 않다. 본채 앞쪽의 지붕이 겹쳐 있어 평면도로 보면 볼록 철(凸)처럼 튀어나온 모습이다. 전체 골격은 십(十)자형이다. 송나라 시대 유행한 건축양식으로 거북 머리처럼 생겼다고 귀두옥(龜頭屋)이라 불렀다. 뒤채라는 뜻의 포하(抱厦)다. 뒤채가 사면으로 볼록하다. 들보도 층층이 쌓고 20여 종의 모양이 다른 두공을 127개나 사용했다. 20세기 고건축학의 태두인 량쓰청은 예진극품(藝臻極品)이라 평가했다. 예술의 가치로 보면 최상품이라는 칭찬이다.
마니전은 석가모니를 봉공한다. 사면이 뒤채라 수많은 보살이 함께 위치한다. 량쓰청이 마니전 전체를 극찬했지만, 진정한 최상품은 또 있다. 석가모니를 등지고 뒷면에 거꾸로 앉은 도좌관음(倒坐觀音)이다. 오색찬란하게 목조로 가산(假山)을 꾸며 벽면을 치장했다. 한가운데 관음보살이 만면의 미소를 머금고 앉았다. 살짝 다리를 꼬고 구름을 밟고 앉은 자태가 우아하고 단정하다. 보면 볼수록 자비심이 철철 넘친다. 3.4m 높이의 관음보살을 중심으로 산과 암석, 물결치는 파도, 천신과 나한, 동물까지 망라했다.
량쓰청이 소감을 남겼다. ‘다른 사찰에 있는 관음과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어느 쪽에서 바라봐도 눈을 돌려 살며시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려는 듯하다’고 했다. 제법 큰 사찰은 이렇듯 대웅보전 뒷면에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관음보살을 구현하고 있다. 량쓰청은 융흥사 답사 후 77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융흥사에 간 적 없는 루쉰이 일본인 사진관이 발행한 사진을 구매했다. 량쓰청이 찍었는지 일본인 사진가가 찍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흑백 사진이었다. 루쉰이 관음의 마음을 느낀 감동은 확실했다. 가로 12.7cm, 세로 17.8cm로 7촌 크기 액자였다. 21세기니 컬러 사진으로 액자나 만들어볼까? 관음에 감정 이입한 루쉰처럼 이름을 남길지도 모른다.
안으로 더 들어가니 이층 누각인 자씨각(慈氏閣)이 나온다. 자씨라는 성씨는 없다. 미륵보살을 봉공하는 전각이다. 미륵은 산스크리트어의 마이트리야(Maitreya)를 번역한 말이다. 자비와 사랑을 뜻하는 자(慈)이며 마치 성씨처럼 자씨보살라 부른다. 7.4m 높이의 북송 시대 미륵목불 입상이 세워져 있다. 전신을 아우르는 배광도 멋지고 선율이 부드럽게 퍼지는 듯한 몸체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나무 하나를 통째로 조각해 만들었다.
신령스럽게 출현한 나무 전설이 따라온다. 홍수가 나자 강물을 따라 오대산에서 떠내려온 나무가 정딩에 이르렀다. 500리를 이동했으니 신이 보낸 선물이 확실했다. 몸가짐 바로 잡고 심혈을 기울여 다듬었다. 자상하고 수려한 보살이 탄생했다. 여성이 바라보면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고 남성은 묘령의 아가씨 자태를 떠올린다. 이 지방 사람이 만든 우스갯소리다. 볼수록 꽃다운 나이의 여인처럼 아름답다.
2016년 6월 26일 국가우정국이 우표 2점을 발매했다. 융흥사가 테마였다. 당연히 도좌관음을 배경으로 한 마니전이 포함됐다. 또 하나는 대비각과 천수천안관음보살이 들어간 디자인이다. 33m 높이의 3층 누각이며 오중 처마의 전각이다. 8년의 건축 기간을 거쳐 북송 초기인 976년에 완공했다. 가로 일곱 칸 중 세 칸에 현대 서예가가 쓴 편액이 걸려 있다. 향불 따라 올려다보니 혜안무변(慧眼無邊)이다. 불교의 혜안은 사물을 통찰하는 안목이다. 지혜와 자비가 끝도 없이 무한한 능력자가 관음보살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22m가 넘는 천수천안관음보살이 우뚝 서 있다. 고개를 거의 수직으로 들어야 꼭대기가 보일 정도다. 입구와 가깝기도 하거니와 청동으로 주조해서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양쪽에 계단이 마련돼 있어 발끝부터 머리까지 볼 수 있다. 2.2m 높이의 수미단은 돌로 제작됐다. 2층으로 올라가니 치마 주름이 세련되게 아래로 쪽 뻗었다. 크고 작은 42개의 팔을 가졌다. 곡선으로 생긴 팔, 90도로 꺾인 팔, 살짝 보듬은 팔, 쭉 펼친 팔, 중생을 안아주는 듯 원을 그린 팔도 있다. 관음보살의 마음을 잘 표현한 예술품이다. 대불(大佛)이다. 정딩에서는 융흥사보다 대불사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금방 알아듣는다.
정딩은 바오딩, 베이징과 함께 북방삼웅진(北方三雄?)이다. 고대에는 중원 북쪽에 위치하는 중요 치소였다. 삼국시대에는 위나라의 영토로 상산군이었다. 촉한의 장군으로 소설이나 민간에서 상승장군(常勝將軍)이라 불리는 조운의 고향이다. 소설에서 백전백승하는 용맹한 장수로 오호상장(五虎上將)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도 관우, 장비, 마초, 황충과 함께 맹장으로 평가된다. 오호장군이란 기록은 없다. 그래서 역사학자 이중톈은 ‘사호장(四虎將)’이라 언급하며 조운에게 굴욕을 안겼다. 융흥사 바로 뒤에 자그마한 조운 묘가 있다.
북방 거점이던 정딩은 문화도시다. 고성에 구루사탑팔대사(九樓四塔八大寺)가 있는데 모두 유명하다. 융흥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개원사(開元寺)가 있다. 남북조 시대인 540년 동위(東魏)가 처음 세웠다. 정관사(淨觀寺)였다. 당나라 현종의 연호가 개원이다. 전국 유명 사찰에 조서를 내려 개원사로 변경하라 했다. 이름이 바뀌지 않고 남은 개원사가 전국에 수십 개에 이른다. 반드시 ‘어디’에 있는지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정딩 4탑 중 하나인 수미탑이 있다. 1.5m의 벽돌 기단 위에 9층으로 쌓은 전탑이다. 아래부터 위로 갈수록 크기가 좁아진다. 정방형으로 쌓고 높이가 39.5m에 이른다. 고성 어디서라도 한눈에 보인다.
수미탑 옆에 거북 형상을 지닌 석상이 있다. 2000년 6월 고성 내 공사 현장에서 출토됐다. 길이 8.4m, 너비 3.2m, 높이 2.6m로 무게가 107톤이다. 오대십국 시대인 930년경 후당(後唐)의 유물이다. 등에 짊어지고 있던 비석은 부서져서 일부만 남았다. 이 거북 형상을 비희(??)라 부른다. 힘이 무지하게 세서 엄청나게 무거운 짐도 거뜬하게 진다. 중국에서 가장 큰 비희다. 제국 시대도 아니고 불과 14년을 버틴 나라가 이다지도 커다란 비희를 만들었다니 놀랍다.
용의 계승자라 믿는 중국인이다. 신화의 주인공인 용에게 아들이 9명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비희다. 용이 거북과 교접해 낳은 아들이라 용이 되지 못했다. 나머지 아들도 다 비슷하다. 용과 혼인해 낳은 아들은 어디선가 용으로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게 신화이자 토템이다.
명나라 시대 수필집인 ‘오잡조(五雜俎)’ 등에 용생구자(龍生九子) 신화가 기록돼 있다. 서로 다른 토템을 지닌 부족을 복속했다는 관념이다. 중화(中華)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비문이 유명할수록 비희를 함부로 만들 수 없다. 황제가 공자에 경의를 표하는 글을 썼다고 하면, 어필을 새긴 비석을 제작한다. 비석을 지고 있는 비희를 함께 만든다. 취푸의 공묘에도 비희가 많다. 전국 유적지에서 만날 수 있다.
정딩을 세 차례 방문했다. 갈 때마다 발전이 빠른 편이라고 느꼈다. 융흥사 뒤에 위치한 영국부(榮國府)와 조금 관련이 있다.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와 함께 4대 소설인 홍루몽에 나오는 저택이다. 주인공 보옥의 증조부인 영국공의 이름을 땄다. 소설 속 주요 공간이다.
시진핑 주석이 서른 살에 정딩현 부서기로 처음 행정가의 길을 걸었다. 소설과 정딩은 인연이 있을까? 하나도 없다. 홍루몽의 무대는 지금의 난징이다. 영국부는 드라마 촬영세트장일 뿐이다. 규모가 작은 현 정부가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350만 위안(약 60억 원)의 투자를 결정했다. 시 주석이 푸젠으로 영전한 후 CCTV가 드라마를 촬영해 방영했다. 이후 관광 수입이 폭증했다. 1980년 중반의 일이다. 시 주석이 사업 기회를 잘 살피는 상기(商機)가 뛰어나다고 모두 눈여겨봤다.
마침 눈이 내렸다. 영국부 패방에도 소복하게 쌓였다. 홍루몽의 저자인 조설근도 하얀 옷을 입고 있다. 제목 때문에 19금 소설로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다. 청나라 중기의 사회를 비판한 소설이다. 저자의 자전적인 삶을 담았다고 알려졌다.
1715년 난징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가산을 몰수당하고 베이징으로 강제로 이주하게 됐다. 가세가 기울어 베이징 교외로 다시 쫓겨났다. 서화를 팔거나 교류하던 문인의 구휼로 연명했다. 베이징 서북쪽 향산 아래 식물원에 고거가 있다. 지금은 가깝지만, 당시에는 거의 귀양살이였다. 그런 피폐한 시기에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쓰던 중 어린 아들이 사망했다. 상심에 빠져 병을 얻었다. 이듬해 40대 후반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루쉰의 고향 사오싱(紹興)의 유서 깊은 제일중학을 방문한 적이 있다. 수업을 참관했는데 마침 홍루몽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보옥과 대옥이 처음 만나는 부분을 설명한다. 일견여고(一見如故)라고 쓴다. 처음 보자마자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친했다는 뜻이다. 반 학생은 약 30여 명이었다. 손을 든 학생이 본문을 읽었다. 질문하고 답변하면 칭찬한다.
중국인은 중학교 때부터 홍루몽을 읽는다. 소설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일찍부터 염두에 두고 자란다. 120회에 이르는 장편소설이다. 조설근은 80회가량 쓰고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다. 소설이 명성을 얻자 30여 년이 흐른 후 정위원이 기획하고 고악이 나머지를 완성했다.
소설은 인간을 만든 여신인 여와의 신화로부터 시작하지만 영국부에서 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악이 나머지 40회 분량을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조설근의 탁월한 구성 때문이다.
초반부에 주인공 보옥은 대낮에 꿈을 꾸고 신선이 사는 태허환경(太虛幻境)을 다녀온다. 금릉십이차(金陵十二釵)에 관한 책자를 보게 된다. 난징의 옛 이름이 금릉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12명의 여인에 대한 사랑과 운명을 설명하는 책이다. 상징으로 가득한 시적 표현이 수두룩하다. 삶 전체에 대한 암시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고악은 그저 잘 마무리만 하면 됐다. 금릉십이차의 인물 캐릭터만 잘 읽어도 흥미진진하다. 조각상과 벽화만 봐도 소설을 다 읽은 느낌이다.
소설을 모르면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여인이다. 금릉십이차의 운명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소설 캐릭터는 상품으로도 등장한다. 빗도 있고 담배도 있다. 소설에는 당연히 12명만 등장하지 않는다. 왕실, 고관대작부터 평민과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계층이 다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수백 명이 등장한다. 모두 개성이 뚜렷하다. 인물의 사회적 지위와 성향을 잘 표현했다.
홍루몽은 인문의 보고이며 중국어사전이자 백과사전이다. 홍루몽을 연구하는 홍학(紅學)은 갑골학(甲骨學)과 돈황학(敦煌學)과 함께 20세기에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은 테마였다. 지금도 아주 뜨거운 학문이다. 홍학 논문만으로 서울대학교 도서관을 채울지 모른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마오쩌둥은 홍루몽의 열렬한 독자였다. 혁명 기간 내내 간부들에게 읽으라고 조언했다. 나라를 세운 후에도 보급을 열심히 했다. 1952년에 소련에서 귀국한 딸이 중국어가 서툴렀다. 홍루몽을 읽으라고 했다. 기자회견장에서는 홍루몽을 5번 읽은 기자에게만 발언권을 주겠다고도 했다.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더없이 좋은 교과서라는 인식이었다.
영국부를 유치한 시진핑 주석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듯하다. 정말 그렇다. 중국 문화의 원천이라는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도 꼭 읽으면 좋겠다. 소설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접근도 쉽지 않긴 하다. 영국부에 내린 눈을 보며 시진핑 정부의 중국몽을 생각한다. 홍루몽과 중국몽, 같은 몽(夢)이지만 둘은 아주 다르다. 그냥 홍루몽이나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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