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호크마 샬롬'은 히브리어로 '지혜여 안녕'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지혜문헌으로 불리는 잠언과 전도서, 욥기를 중심으로 성경에 담긴 삶의 보편적 가르침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합니다.
나는 장남이다. 어릴 적 아버지가 자주 강조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으로 기억되는, 아버지가 출장 가시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며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이 있는 식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없을 땐 장남인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다. 다녀올 때까지 집안을 잘 지켜라.” 듣는 나도 황당했지만, 어머니도 속으로는 피식하셨을 것이다.
장남의 지위는 달콤했다. 두 고모로부터 관심을 듬뿍 받았고, 형제들에게 내려지는 무언가가 있다면 내가 늘 먼저 차지했다. 하지만 누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동생과 분쟁하게 되면 형이기 때문에 양보할 것을 요구받았다. 형이니까 참으라는 원리를 동생은 꽤 악용했었다.
한국의 장남 우선권이 성경에도 낯설지 않다. 고대 이스라엘도 아시아 문화권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맏아들의 권리’라는 것이 있어서,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때 첫째는 다른 형제들보다 2배 더 받았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을 권리도 맏아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맏아들의 특권뿐만 아니라 그 대가도 확실하게 말한다. 태를 처음 열고 나온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도 첫 태생은 하늘이 주장할 수 있었다. 즉 ‘희생’이 요구된다. 맏이는 첫째로서 대접받는 특권도 있지만, 형제들과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는 책임도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성경에는 장남보다는 차남이나 동생들이 더 잘되는 이야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맏아들을 대우하는 그 문화를 고려해 보자면 참 역설적이다. 날 때부터 형에게 지기 싫어서, 야곱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의 발목을 붙잡고 태어났다. 그리고 늘 자기의 쌍둥이 형 에서를 이겨 먹었다. 그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생겼다. 여기서도 막내급인 요셉이 나중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형들과 가족을 보살펴 준다. 맏아들 르우벤은 가족 안에서 불건전한 관계를 저질러 족보에 장남으로 오르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도 위의 형들을 제치고 왕으로 선점되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로 유명하다.
장남의 수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장남으로 표현하는데 (출애굽기 4:22), 이 맏아들이 특권만 생각하고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민의식이 가득하여 하나님은 자기들만 사랑하는 분이며 이방인들은 배척당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이 이방인도 소외된 사람도 사랑할 것을 말했지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냈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이 이방인의 구원에 관심을 두자 몹시 못마땅하여 도망가버렸다.
결국 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삐뚤어진 신앙 전통을 지적했고, 하나님의 장남으로 선택된 특권만 누리자는 종교 지도자들의 사상을 비난했다. 특히 예수의 다음 말이 의미심장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태복음 20:16). 그러나 예수를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유대인들조차도, 이 새로운 신앙을 이방인이 누려야 하는지 아닌지 고민했었다. 믿으려면 자기네처럼 할례의식(포경수술)을 받고 예수를 믿으라며 꼰대처럼 굴기도 했다.
먼저 된 자들은 먼저 누린다. 먼저 누린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나중 된 자를 위해 같이 누리려 양보하는 것이다. 먼저 성공하고 앞선 자들이 나중 된 자들을 위해 배려하여야 사회는 아름답다. 특히 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사랑을 먼저 알고 행복했다면, 이웃을 위해 더 희생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성경은 말한다(로마서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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