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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운 코로나 봉쇄 시대… 한국 영화가 파고들다

입력
2021.08.26 04:40
15면

<31> 코로나가 바꾼 한류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 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인 2019년 8월 베트남 하노이의 호안끼엠 맥주거리에서 시민들이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인 2019년 8월 베트남 하노이의 호안끼엠 맥주거리에서 시민들이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베트남 사람들은 저녁 약속을 일찍 잡는다. 웬만하면 오후 4시, 좀 늦게 보자고 하면 5시가 보통이다. 일 년 내내 더운 나라다 보니 오전 8시 전에 업무를 시작하기에 퇴근도 빠르다. 주로 만나는 장소도 이른바 '목욕탕 플라스틱 의자'를 펼쳐 놓은 노상 식당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느리게 해가 지고, 초저녁 바람이 선선해질 무렵 당연하다는 듯 집으로 향한다. 이후 공터나 놀이터 등에서 가족과 배드민턴을 치거나 지인과 베트남식 제기차기(따가오)를 즐긴 뒤 하루를 마무리한다. 밤 8~9시쯤 베트남 어디를 가도 운동하는 수많은 현지인을 볼 수 있다.

늦은 오후와 저녁 여가 활동이 삶의 낙인 베트남인들에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 선제 봉쇄가 거의 유일한 방역책인 탓에 식당과 카페는 지난 1년 6개월의 절반 이상을 휴업했다. '외부 장소 5인 이상 집합 금지'는 6개월이 넘었고, 그 중 석 달은 아예 야외활동이 전면 통제됐다. 코로나19로 인한 여가 생활의 붕괴. 갑자기 붕 떠 버린 시간을 마주한 베트남인들에겐 새로운 놀거리가 필요했다.


K무비, 신규접촉·시간투자 모두 1위 등극

지난해 7월 베트남에 개봉된 한국영화 '반도'의 현지 포스터. CGV 베트남 홈페이지 캡처

지난해 7월 베트남에 개봉된 한국영화 '반도'의 현지 포스터. CGV 베트남 홈페이지 캡처

코로나19가 만든 심심한 밤은 새로운 생활 패턴을 요구했다. 습관적으로 트는 현지 방송 채널은 새로울 것 없는 방역 뉴스만 가득했다. 이미 보편화한 K팝이 있지만, 노래 한두 곡으로 그 시간을 모두 보내긴 힘들었다. K드라마는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을 통해 이미 실시간으로 신작들을 챙겨보고 있던 터였다.

한국 영화(K무비)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두 시간 정도는 투자할 만큼 넉넉해진 시간과 새로운 영상물에 대한 현지 수요가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베트남비즈니스센터가 지난해 9월 시민 200명을 상대로 진행한 심층 설문조사와 페이스북 페이지 1,000만 개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분석(Social Analysis)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 이후 새롭게 접한 한류 콘텐츠 1위는 영화(23%)였다. 같은 기간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한류 역시 영화(31%)였다.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K팝은 신규 접촉(21%), 시간 투자(23%) 두 부분에서 모두 2, 3위로 밀려났다.

K무비의 성장은 '한류 콘텐츠 체험 형태 변화' 항목에서도 확인된다. 코로나19 이전 현지인의 66%가 스마트폰을 통해 한류를 접했던 반면, 오프라인을 통한 체험은 1%에 불과했다. 반면 지난해엔 오프라인 이용이 18%로 급증했다. 방역정책이 잠시 완화한 지난해 7~9월 운 좋게 개봉된 '반도' 등의 K무비가 현지인들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애용됐기 때문이다. '반도'는 이전 베트남 개봉 한국 영화 흥행 1위였던 '기생충'(286만 달러)을 제치고 330만 달러의 수익까지 거뒀다.

온라인 영역에서도 K무비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난해 넷플릭스를 통해 가장 많이 본 영화 2위는 '더 콜'이었으며, 5·6위는 '도둑들'과 '살아있다'가 차지했다. '미나리', '침입자', '사냥의 시간' 등도 입소문을 타며 '현재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넷플릭스 영화 탑10'에 수차례 올랐다. 같은 해 베트남인이 구글을 통해 가장 검색을 많이 한 영화 순위에서도 K무비는 돋보였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기생충'이 1위, '신과 함께:죄와 벌'이 8위를 기록한 것이다.

베트남 영화진흥위원회(VFDA) 관계자는 "'기생충'의 국제적 성공 소식이 관심을 불러 일으킨 이후 '신과 함께' 시리즈와 '살인의 추억'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들이 줄줄이 베트남에 소환됐다"며 "한국식 영화 화법에 재미를 느낀 이들이 '낙원의 밤' 등 최신작까지 섭렵하고 있어 K무비 인기는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드라마 '다시보기'도 유행, K애니·예능도 기지개

한국 드라마가 8월 베트남 넷플릭스 TV프로그램 인기 순위표의 1위부터 8위까지 상위권을 점령했다. 1위 '슬기로운 의사생활', 2위 '알고 있지만'을 제외한 나머지 드라마는 모두 기방영된 작품이다. 플릭스패트롤(FLixpatrol) 캡처

한국 드라마가 8월 베트남 넷플릭스 TV프로그램 인기 순위표의 1위부터 8위까지 상위권을 점령했다. 1위 '슬기로운 의사생활', 2위 '알고 있지만'을 제외한 나머지 드라마는 모두 기방영된 작품이다. 플릭스패트롤(FLixpatrol) 캡처

K무비가 쏘아 올린 '한류 다시보기'는 현재 K드라마 영역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25일 기준 이번 달 '베트남 넷플릭스 TV프로그램 탑10' 순위만 보더라도 현상은 명징하다. 1~8위를 모두 석권한 한국 드라마 중 3위는 2019년 작인 '배가본드', 4위는 2017년 방영된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다. 6~8위 역시 '태양의 후예'(2016년), '응답하라 1988'(2015년), '사랑의 불시착'(2019년) 등 이미 종영된 K드라마다. 특히 '응답하라 1988'은 지난해 전체 베트남 넷플릭스 인기 TV프로그램 순위에서도 3위를 기록하며 '메가 히트작' 반열에 올랐다..

속도가 붙은 베트남 한류는 더 다양한 K콘텐츠를 원하는 모습이다. K무비의 선전에, 현지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라바'와 '뽀로로'의 인지도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K드라마 인기 배우들이 등장하는 '우리 결혼했어요'(2012년) 등 과거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재방영까지 불러왔다. K팝이 뿌린 씨앗 위에 K무비·드라마가 꽃피웠듯, 애니메이션 등 새로운 콘텐츠도 발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KOCCA 베트남비즈니스센터는 "빠른 속도로 개선되는 인터넷 및 모바일 환경에 한류 고정팬까지 안정화하는 추세"라며 "번역 정보와 신뢰도 높은 공급업체가 부족한 현실 등을 극복한다면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도 한류 인기는 다양하게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9월 베트남 하노이 쩐지흥 CGV에서 개최된 한국 애니메이션 '뽀로로' 상영회에 참석한 어린이들이 집중해서 영화를 보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베트남비즈니스센터 제공

지난해 9월 베트남 하노이 쩐지흥 CGV에서 개최된 한국 애니메이션 '뽀로로' 상영회에 참석한 어린이들이 집중해서 영화를 보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베트남비즈니스센터 제공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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