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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테러의 신호탄이 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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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의 숙청 등 모든 권력의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은 권력 혹은 인간성의 보편 속성에서 비롯된 폭력이다. 국가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인 백색·적색테러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건 각각 프랑스대혁명과 1918년 러시아혁명 직후 내전기였다. 18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공포정치를 끝장낸 프랑스 왕당파는 자코뱅 혁명파에 대해 조직적 테러를 일삼았고, 시민들은 왕당파가 모자에 꽂은 흰 모표(cockade)에 착안해 그 행위를 '백색테러'라 불렀다.
반면 10월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는 광의의 백군, 즉 군주제와 자본주의 등을 지지한 다양한 분파와 1922년 10월까지 내전을 치렀고, 그 전쟁은 러시아 전역, 심지어 볼셰비키 진영 내부의 '불순분자' 처단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연간 약 2만여 명이 처형됐다. 이른바 적색테러였다. 이후 백색·적색테러는 각각 우파·좌파 권력의 광의의 국가폭력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볼셰비키는, 혁명기의 오랜 살육과 시민들의 정치 환멸의 무마책으로 사형제를 폐지했다. 그 바탕에는 사회·공산주의형 인간 개조 교육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냉정히 말하면 부푼 이상주의적 발상이었다. 볼셰비키는 이듬해 8월 레닌 암살기도 직후 사형제를 부활시켰다.
유대계 우크라이나 출신 여성 사회주의혁명당(SR) 당원 패니 카플란(Fanny Kaplan)이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의 한 공장을 시찰하고 나서던 레닌에게 권총 세 발을 쏘아 중상을 입혔다. 볼셰비키 이외의 모든 좌파 정당의 활동을 금지시킨 데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볼셰비키는 나흘 뒤 카플란을 처형했다. 약 2주 전인 8월 17일에도 볼셰비키 핵심 혁명가로 페트로그라드(현 페테르부르크) 비밀경찰 체카(Cheka) 수장이던 모이세이 우리츠기(Moisei Uritsky, 1873~1918)가 로마노프 왕조 군벌 출신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당했다. 카플란의 처형이 적색테러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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