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내요, 아이티여! 

입력
2021.08.20 22:00
23면
아이티에서 규모 7.2의 강진으로 7세 딸을 잃은 여성이 슬픔에 오열하고 있다. AP 뉴시스

아이티에서 규모 7.2의 강진으로 7세 딸을 잃은 여성이 슬픔에 오열하고 있다. AP 뉴시스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에서 규모 7.2의 강진이 일어난 것은 지난 14일이었다. 이로 인해 2,000명 넘는 사람이 죽고 1만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떴다. 2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2010년 대지진 이후 11년 만에 발생한 이번 참사로 그러잖아도 궁핍하던 아이티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내몰리고 있다.

아이티를 생각하면 매몰차게 걷어차인 사다리가 떠오른다. 미어질 듯 가슴 아픈 그림이다.

아이티는 아메리카 대륙의 길목인 히스파니올라섬에 들어선 나라다. 중국의 황금을 찾아 바다를 떠돌던 콜럼버스의 배 산타마리아호가 좌초한 곳, 그리하여 유럽 정복자 무리의 첫 베이스캠프가 들어섰던 바로 그 섬이다.

콜럼버스 착륙 이후 이 섬은 여러 나라 정복자들이 차례로 깃발을 꽂으면서 이름을 달리했다. 생도맹그로 불리던 18세기, 이 섬의 소유주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식민개척자들은 이 땅에 8,000개 넘는 사탕수수와 커피 농장을 일궈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모았다. 당연하게도 이곳 농장에서 커피와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펄펄 끓는 솥에 끓여 설탕을 만들어내는 고된 일은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50만 명의 노예들 몫이었다. 비참한 착취 노동의 전형이었다.

자유, 평등, 박애! 혹사당하던 노예들은 1789년 프랑스 본토에서 날아온 혁명구호에 들떴다. 웬걸! 생도맹그의 식민개척자들에게 ‘자유’란 정부의 간섭 없이 원하는 대로 흑인 노예를 부려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의미했다.

출구가 죄다 막혔을 때 할 수 있는 건, 죽을 각오로 싸우는 일뿐이다. 노예들은 쇠스랑과 낫을 휘두르며 프랑스 군인들과 맞섰다. 불세출의 혁명가 투생 루베르튀르의 지휘 아래 게릴라군으로 거듭난 그들은 프랑스의 돈줄을 끊으러 이 섬에 상륙한 영국 군대와도 싸우고, 황금보다 값진 사탕수수와 커피 농장을 되찾겠다며 진군한 6만5,000명의 나폴레옹 군대와도 맞서야 했다. 수적 열세에다 무기와 보급품마저 없이 계속된 전투에서 그들은 산속으로 숨어 역병 시즌까지 버텨내는 전술을 택했다. 바이러스는 충직한 우군이었다.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3만 명 가까운 병사를 잃은 프랑스군은 1803년 11월 이 섬에서 전면 퇴각했고 카리브해 제국을 건설하려던 나폴레옹의 꿈도 좌절됐다. 그리고 1804년 1월 1일, 주민 전체가 노예 출신으로 구성된 최초의 흑인 독립국 아이티가 탄생했다. 새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장면이었다.

반면 식민지 노예무역으로 재미를 보던 유럽 열강과 미국에 노예 독립국의 출현은 말 그대로 공포였다. 그들은 첫걸음을 떼는 신생국에 가혹한 통상 봉쇄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앙갚음을 했다. 나라 경제의 뼈대인 설탕과 커피 무역권을 하루아침에 걷어차인 아이티는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다. 패권 경쟁의 그림자는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서, 아이티에 재난이 닥칠 때마다 과거 식민 종주국과 미국 등은 인도적 지원을 넘어 어떻게든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셈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나라 아이티가 이대로 좌초하는 건 역사의 퇴보이자 21세기 시민들의 무책임이다. 지금 곤경에 빠진 아이티 사람들이 유전자에 각인돼 있을 투지를 끌어모으기를, 그들을 돕기 위해 국제사회가 사심 없이 나서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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