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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실한 떡잎들을 키운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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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노벨상을 탄 분자생물학자 마리오 카페키(Mario Capecchi, 1937~)는 파시즘 체제의 이탈리아에서 만 4년을 전쟁 고아처럼 거리를 떠돈 사연으로 유명하다. 그는 영양실조로 병원에 수용됐다가 전후 나치 수용소에서 생환한 어머니를 극적으로 만나 미국으로 이민, 생물학자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에게 노벨상을 안긴 '유전자 적중법(gene-targeting, 특정 배아줄기세포의 DNA를 추출해 수정란에 이식하는 기법)' 연구 신청서를 미 국립보건원(NIH)이 외면한 일화도 그의 개인사 못지않게 유명하다.
미국 의료보건정책 총괄 행정기구인 NIH는 한해 예산 417억 달러(2021 회계연도)의 약 80%를 대학과 연구소 및 프로젝트에 지원하는 세계 최대 기초의학 연구지원단체다. 노벨상을 타기 전 카페키는 자신의 연구를 세 파트로 나누어 NIH에 지원서를 냈는데, NIH측은 핵심 분야인 세 번째 파트의 지원을 거부했다. 그는 지원금 사용 규정을 무시하고, 세 번째 연구에 일부를 썼고, 마침내 노벨상을 탔다. 훗날 그는 "만일 성과가 없었다면, 지금 나는 연구실 바닥을 닦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NIH측은 "당신이 우리 조언을 따르지 않아 무척 다행스럽다"며 부끄러움을 눙쳤다.
2012년 스탠퍼드의대 예방의학센터 연구팀은 2001년 이래 발표된 생의학 논문 중 SCI(과학인용색인) 인용 횟수 1,000회 이상의 논문 제1저자 가운데 NIH 연구비 지원을 받은 학자가 40%에 불과하고, 한해 약 8만 건의 신청서를 검토하는 NIH 심사위원 중 1,000회 이상 인용 논문 제1저자는 0.8%뿐이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NIH 연구 지원서 심사가 부실해서 연구 주제보다 인맥 등에 쉽사리 휘둘리고,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연구(swing-for-the-fences studies)보다 적으나마 성과가 예상되는 주제(incremental science)를 중시한다고 비판했다. NIH 수장인 유전학자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는 NIH가 연구자금을 지원해 약 15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2007년 이래 주요 2개 과학저널에 수록된 논문 중 영향력 '베스트 10'이 모두 NIH 지원 논문인 점을 환기하면서도, 관료주의의 폐해와 예산 집행의 보수화 경향도 인정했다. 그는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하워드휴스의과학연구소(HHMI)' 부소장 겸 과학최고책임자(CSO) 잭 딕슨(Jack Dixon)은 "연 300억 달러(당시 기준)가 넘는 막대한 돈을 그다지 영향력 없는 과학자들에게 쓰고 있다는 사실이 다만 놀라울 뿐"이라고 논평했다.
HHMI는 흔히 NIH의 보수주의를 꼬집을 때면 심심찮게 대비되는 민간부문 카운트파트로, 염세의 은둔가로 유명한 기업인 겸 모험가 하워드 휴스(1905~1976)가 1953년 말 설립한 의료연구기관(MRO)이자 지원단체다. 총 자산 212억 달러( 2020 회계연도 기준)를 보유한 HHMI는 연 6억 5,300만 달러를 연구자에게, 6,600만 달러를 학교와 각종 과학교육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있다. NIH와 달리 가시적 성과 전망보다 도전적인 연구 주제를 선호하고, 연구자의 소속과 신분을 굳이 HHMI 소속과 연구소로 옮기도록 요구하지도 않고, 중간 실적 보고서를 재촉하지도 않으며, 기본 5년간 연구비를 지급하고 성과가 없더라도 연구자가 원할 경우 추가 2년간 지원을 연장하는 방식을 고수해왔다. 규모 면에서는 NIH와 비교가 안 되지만 HHMI는 88년 이래 31명의 노벨상 생의학-화학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그중 26명이 2000년 이후 수상자다. NIH가 외면한 카페키를 지원한 것도 HHMI였고, NIH 콜린스 원장 역시 HHMI 출신이었다.
1953년 출범 이래 휴스의 세금 방패막이로 활용되며 "위장 자선단체(counterfeit charity)"라는 오명까지 썼던 HHMI를 휴스 사후, "생의학 연구 분야의 가장 강력한 민간 동력"으로 끌어 올린 원년 주역인 HHMI 전 소장 퍼넬 쇼팽(Purnell Whittington Choppin, 1929.7.4~ 2021.7.3)이 별세했다. 향년 91세.
하워드 휴스(1905~1976)는 공학적 재능을 지닌 빼어난 사업가나 승부사 기질의 영화감독, 개척자적 비행사임에는 틀림없지만, 자선가나 박애주의자라 평가하는 건 왜곡에 가까운 과장이다.
그는 만 16세 되던 21년 어머니를 여의고 3년 뒤 아버지를 잃었다. 원유 시추용 암반 굴착 3점 드릴(three headed bit)을 개발해 큰 돈을 번 아버지 휴스 시니어는 '휴스 툴 컴퍼니(Hughes Tool Company)'라는 회사를 유산으로 남겼고, 그 유산이 영화산업과 항공 군수산업, 부동산 사업 등으로 갑부가 된 휴스의 사업 밑천이었다. 휴스는 사업 못지않게 비행사로서 도전적 모험에 심취했고, 유년기 앓은 뇌수막염 트라우마로 중년 이후 극도의 건강염려증과 대인기피증세를 보이며 라스베가스와 카리브해의 별장에 은둔하며 사업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회사 중역들에 대한 불신까지 심해 주요 결정권한을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결정을 미루거나 외면하는 일이 잦아지자 임원들이 집단 사표를 내는 등 회사를 마비 지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급기야 1953년 9월 미 공군참모총장(Harold E. Talbott)이 그를 직접 찾아가, 석달 내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컴퍼니'와의 모든 계약을 철회하겠다고 최후통첩했다.
53년 12월 휴스는 '휴스 에어크래프트사(Hughes Aircraft)'를 설립해 '컴퍼니'의 주력인 항공장비파트를 이관받아 새출발할 것이며, 새 회사의 모든 지분을 신설 비영리 의학연구소인 HHMI로 넘긴다고 발표했다. "저명한 비행사이자 사업가인 하워드 휴스"로 시작되는, 자신이 직접 쓴 보도자료에 그는 "(HHMI는) 매년 수백만 달러로 의학 연구를 지원함으로써 인류 보건에 공헌하고 궁극적으로 생명의 비밀을 궁구할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HHMI는 회사 이윤에 대한 법인세 및 개인 소득세 면세 수단에 불과했다. 게다가 사전에 작성된 복잡한 장비 임대 및 자금계약으로 에어크래프트사는 장부상 1,800만 달러의 부채를 떠안은 상태였다. 이듬해 1년간 HHMI가 연구사업에 들인 돈은 4만 5,000달러에 불과했고, 첫 10년간 쓴 돈을 합쳐도 500만 달러에 못 미쳤다. 휴스는 HHMI의 대표이사이자 유일한 이사였다.
1955년 미 국세청(IRS)이 HHMI의 탈세 사기 혐의 조사에 착수했다. 휴스는 57년 당시 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의 동생 도널드 닉슨에게 20만 5,000달러를 이자 없이 빌려줬고, 직후 IRS는 특별한 근거 없이 HHMI의 비영리 자선단체 지위를 재확인했다. 그 사안은 60년 대선 기간 스캔들 의혹 중 하나로 부각됐다.
한 차례 결혼-이혼하고 독신으로 살았던 휴스는 76년 숨졌고, 여러 복잡한 소송 끝에 84년 델라웨어 법원은 HHMI를 휴스의 모든 유산 상속자로 인정, 이듬해 말 8명의 이사진을 선임했다.
시카고대 총장 한나 그레이(Hanna H. Gray), 듀퐁사 전CEO 어빙 샤피로(Irving S. Shapiro)등 이사진은 NIH 수장을 지낸 도널드 프레드릭슨(Donald S. Fredrickson)을 HHMI 신임 대표로 선출했고, 85년 12월 에어크래프트사를 52억 달러에 GM에 매각함으로써 HHMI를 독립 연구-지원기관으로 재정비했다. 총자산의 최소 3.5%를 설립 목적에 따라 써야 한다는 국세청 비영리 면세 규정에 따라, HHMI는 한해 최소 1억 8,000만 달러를 연구사업에 써야하는 미국 최대 민간 비영리 연구지원단체로 거듭났다. 원년 HHMI 부소장 겸 최고과학책임자(CSO)가 퍼넬 쇼팽이었다.
루이지애나 주립대 화학과 교수 아버지와 고교 교사 어머니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난 조지 퍼넬 휘팅턴 쇼팽은 53년 루이지애나 주립대 의대(MD)를 졸업하고, 공군 군의관(54~55)과 록펠러대 의대 박사후과정(57년)을 거쳐 59년 모교 교수가 됐다.
지금 전세계 의과학자들이 코로나 팬데믹에 맞서 벌이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본격화한 게 1950년대였다. 1931년 발명된 전자현미경 덕에 바이러스의 실체와 구조 및 기생-복제의 메커니즘이 잇달아 밝혀지던, 말 그대로 바이러스 연구의 황금기였다. 조너스 솔크가 55년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했고, B형간염 바이러스(63년)와 레트로 바이러스(65년)의 실체가 잇달아 규명됐다. 쇼팽이 박사후과정을 시작한 57년은 미국서만 7만여 명의 희생자를 낸 '아시아 독감(flu-epidemic)'이 발병한 해였다. 쇼팽의 연구분야도 바이러스였다.
쇼팽은 인플루엔자와 홍역 등 바이러스가 세포에 침투해 유전자를 복제하는 기전을 밝혀내고, 백신 연구에 필요한 바이러스 증식 기법을 개발한 원년 연구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자신의 목에서 6개의 'H2N2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채취-증식시켜, 백신 연구용 샘플로 공개한 것도 57년 일이었다. 그는 만 28년 대학에 재직하며 바이러스 만성감염과 신경 질환의 관련성을 규명했고, 훗날 록펠러대 총장을 지낸 노벨상 수상자 데이비드 볼티모어(David Baltimore) 등과 81년 미국바이러스학회를 창립했다. 볼티모어는 "쇼팽은 바이러스 감염 메카니즘 등 초기 연구를 통해 최근의 코비드 팬데믹 등 여러 바이러스-백신 연구의 토대를 닦은 과학자"라며 "그들 덕에 근년 연구자들은 팬데믹 사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유효한 해법을 모색할 수 있게 됐다"고 평했다.
쇼팽은 루이지애나대 바이러스 연구소장과 대학원장, 연구부총장을 역임하며, 관리자로서의 능력도 입증했다. 그가 새로 출범한 HHMI의 CSO로 발탁된 것도, 2년 뒤 초대 소장 프레드릭슨이 공금 유용 등 회계 부정으로 쫓겨난 뒤 "미국 전역의 100여 명의 기라성같은 후보들을 제치고" 이사진에 의해 87년 9월 신임 대표로 선출된 것도 그래서였다.
취임 후 그는 HHMI의 연구-지원 분야로 기존의 면역학, 유전학, 신경과학, 세포생물학에 구조생물학(structural biology)을 추가하고, 연 4,000만 달러 규모의 교육 지원 프로젝트와 단기 연구 윤리 강좌 등 과학 컨퍼런스 지원 사업도 시작했다. HHMI가 쓸 수 있고, 또 써야 할 예산은 엄청났지만 '재단'이 아닌 의학연구기관(MRO)으로 인가받은 터여서, 지원 프로젝트마다 부속 연구소를 설립하거나 대학이나 다른 연구기관 연구자를 HHMI 소속으로 직을 옮기게 하지 않는 한 자금 지원에 제약이 따랐다. HHMI 특유의 '조사자 프로그램(investigator program)' 즉 HHMI가 'investigator'라는 직책으로 해당 연구자를 채용해 어느 기관 소속이든 어디서 연구하든 지원할 수 있게 묘책을 낸 것도 쇼팽이었다.
99년 은퇴하기까지 그가 만 12년간 대표로 재직하는 동안, HHMI 과학자는 96명에서 330명으로 연 예산은 7,700만 달러에서 5억 5,600만 달러로 늘어났다.(2020년 6억 5,000만 달러, 교육지원예산 6,6000만 달러 별도.) 2013년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가 찾아낸 최고의 연구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게 된 건 대단히 흥분되는 일이었다"고, "그들의 뿌리를 옮기지 않고 어디 있든 연구비를 지원한다는 건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단기 성과에 쫓기지 않게 안정적인 지원을 보장한 것도, 기존의 성과 위에 벽돌을 얹는 연구보다 빈약한 터전 위에 새로운 토대를 개척하는 연구에 더 주목한 것도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이었다. 60~70년대 노벨상의 텃밭으로 불리던 바이러스에 대한 그의 연구가 수많은 성취의 거름이 됐듯이, 그는 기금 관리자로서 수많은 과학자들의 성과를 보조했다.
HHMI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쓰이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사람(People, not project)"이란 말을 만든 것도 쇼팽이었다. 그는 88년 인터뷰에서 "우리는 (연구자의) 독창성을 본다. 어떻게 주제를 포착하고 거기 매달려 왔는지가 관건이다. 연구의 정맥을 포착하는 직관을 우리는 중시한다"고 말했다. 현 HHMI CSO인 딕슨은 "HHMI는 연구 실패의 위험을 회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만일 당신이 없다면 그 연구분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먼저 묻는다"고 말했고, MIT의 피에르 아줄레(Pierre Azoulay)는 "(HHMI 지원 논문에) 고만고만한 것들 만큼이나 다수 피인용 논문이 또 많은 까닭이 그것"이라고 말했다.
동기가 뭐였든 저 모든 것들은 하워드 휴스로부터 비롯됐고, 쇼팽은 휴스에 대한 고마움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부각하곤 했다. '하워드 휴스의 놀라운 유산'이란 제목의 1996년 에세이에 그는 1920년 뇌수막염에 걸린 15세의 휴스를 위해 당시 록펠러 의학연구소 소장이던 사이먼 플렉스너(Simon Flexner)가 헨리 치커링(Henry Chickering)이라는 당시 병원 레지던트를 설득해 텍사스까지 가서 치료해준 일화를 소개하며, 그 긴 인연이 복류(伏流)해서 HHMI라는 위대한 유산이 됐다고 썼다. 은퇴 후 그는 '래스커 재단' 이사로 2011년까지 일했다.
겸양의 미덕을 겸비한 탁월한 과학자이자 막강한 전염력의 멋진 미소까지 지녔던 그는 1961년 결혼한 영양학자 조앤 맥도널드(Joan MacDonald)와 딸 한 명(Kathleeen)을 두었다. 고향 배턴루지의 한 매체는 그가 플라잉 낚시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자였다고 소개했다. 유족은 부의금을 미국철학회와 대서연어연맹(ASF)에 기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번주 '레터에서는 기초과학지원사업, 또는 관리 일반의 원칙과 명암에 대해, 한국 사정을 포함하여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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