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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덕온공주 집안의 유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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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들과 문화재 전문가들이 그동안 잘 몰랐던 국외문화재를 소개하고, 활용 방안과 문화재 환수 과정 등 다양한 국외소재문화재 관련 이야기를 격주 토요일마다 전합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2018년은 특별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귀한 문화재들을 해외에서 잇달아 들여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느라 정신 없이 보낸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지금에 와 돌아보면 덕온공주 집안과 신기한 인연이 계속된 한 해였다.
2018년 초 당시 국외 문화재 유통시장 조사와 중요문화재 매입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던 필자는 알고 지내던 해외 관계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4월 뉴욕에서 열리는 경매에 동물 모양의 동제 인장 한 점이 출품될 예정인데, 그것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인장에는 '덕온공주지인(德溫公主之印)'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1822-1844)의 인장이었다.
공주의 인장이 남아 있는 예는 극히 드물다. 신속하게 자료조사부터 시작, 심층적 분석과 검토에 들어갔다. 인장, 금속공예, 역사 왕실 등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 반드시 환수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물 조사까지 마치고 경매에서 경합 끝에 낙찰에 성공했고, 5월에 국내로 반입,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안전하게 격납할 수 있었다.
덕온공주 가족과 재단의 인연은 이보다 앞선 2017년 6월 재단이 프랑스 경매시장에서 발견한 뒤 2018년 1월에 들여온 '효명세자빈책봉죽책(효명세자빈을 책봉할 때 수여한 대나무로 만든 책)'에서부터 이미 시작됐다. 효명세자(1809~1830)는 순조(1790~1834)와 순원왕후(1789~1857)의 맏아들로, 순조의 건강 악화로 1827년부터 3년간 대리청정을 하였다. 짧은 기간에 세도정치를 혁파하고자 인적 쇄신과 개혁 정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그러나 1830년 개혁 군주로서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채 불과 스물두 살에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였고 삶은 길지 않았지만 문학과 예술에도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효명에게는 명온(1810~1832), 복온(1818~1832), 덕온(1822~1844)의 세 여동생이 있었다. 막내딸인 덕온공주가 아홉 살 되던 해, 오빠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났고 덕온공주가 열한 살 되던 해인 1832년 5월에 둘째 복온(15세), 그 한 달 뒤에는 첫째 명온(23세) 공주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년 뒤인 1834년 아버지 순조 역시 세상을 등지게 된다. 덕온공주는 그 10년 뒤인 184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공주의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세자와 세 공주는 짧은 삶 속에서 서로 애틋한 정을 나누었다. 그 흔적은 그들이 남긴 여러 편지들과 문학작품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덕온공주 인장 환수에 성공한 뒤 해외 소재 몇몇 문화재들에 대한 환수 검토와 시도가 있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끝까지 추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계속 활발히 교류해 오던 국립한글박물관 관계자로부터 미국 소재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 자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에 즉시 소장자 측에 연락하여 교섭에 들어갔고, 동시에 유물에 대한 평가에 착수했다. 이 유물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덕온공주 관련 한글 자료 중 가장 중요도가 높은 편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연말을 앞두고 숨가쁘게 교섭과 절차를 진행해 결국 국내로 다시 들여올 수 있었다.
이때 들여온 덕온공주 집안의 자료들은 덕온공주, 덕온공주의 양자 윤용구(1853~1939), 윤용구의 딸 윤백영(1888~1986)의 작품이 주를 이루고, 집안에서 간직해 왔던 순원왕후, 명성황후 등 왕실 가족들로부터 받은 편지들이 있으며, 유려한 글씨체로 유명했던 상궁들의 글씨, 또 덕온공주 집안에서 보관하던 한글과 한문 서책 등이 있다.
3대에 걸친 덕온공주 집안 유품들에서 일관되게 볼 수 있는 것은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며, 그 매개체가 된 것은 주로 한글이었다. 유려한 한글 서체의 아름다움을 보며 감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업무를 진행하면서 직면했던 많은 어려움들을 잊게 하는 큰 즐거움이었다.
덕온공주 한글자료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자경전기'에는 대를 이어 내려온 지극한 효성이 담겨 있다. 덕온공주의 할아버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잘 모시기 위해 창경궁에 자경전을 지었다. 후에 혜경궁은 자신의 거처를 옮기고 정조 비 효의왕후에게 자경전에서 지내도록 하였는데, 효의왕후는 순조에게 자경전기를 쓰도록 하였다. 정조가 자경전을 짓게 된 내력과 혜경궁의 양보, 효의왕후의 덕, 자경전의 빼어난 경치 등을 담고 있다. 그리고 순조의 비 순원왕후는 덕온공주에게 아버지 순조가 지은 한문 자경전기를 한글로 옮겨 적도록 했다. 정조, 순조, 덕온공주로 이어지는 3대의 효심이 깃든 기록인 것이다.
덕온공주의 아들 윤용구는 딸 윤백영의 교육을 위해 '여사초략'이라는 교훈서를 직접 써 주었다. 한문으로 짓고 토를 달고 한글 번역까지 썼다. 또한 고종의 명을 받들어 궁중 여인들의 교육을 위해 한글로 쓴 중국 역사서인 '정사기람'을 집필하였다. 후에 윤백영은 창경궁 장서각에 출입하며 독서를 하다가 아버지가 쓴 정사기람 80권 중 권19가 유실된 것을 발견하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직접 빠진 부분을 다시 번역하고, 아버지의 필체를 따라 적어낸 정사기람 권19를 1964년 장서각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순원왕후, 신정왕후, 명성황후 등 궁궐 안팎의 왕실 가족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에는 곁에 없더라도 수시로 가족의 안부를 묻고, 건강을 염려하고, 기쁜 일을 축하하고, 근심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마음이 정갈한 한글 궁서체에 실려 있다. 마치 요즘 우리가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부모형제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공감이 가며, 이해하기 쉬운 한글로 쓰여 있기에 그 마음의 울림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덕온공주 아들 윤용구는 한때는 왕실 가족이자 관리로서 대우받고 살았겠으나, 고종의 강제 퇴위 후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국권 피탈 후에는 일제가 준 작위와 은사금을 거절하였다고 하며, 이에 따라 여유로운 삶을 누리지 못한 것 같다. 덕온가의 중요한 한글자료들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넉넉지 않은 형편과 험난한 시기에도 유산을 소중하게 지켜 온 후손들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유물 하나하나에 그 내력을 기록하고 설명을 남긴 윤백영의 노력이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빛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덕온공주와 순원왕후의 글씨를 구별할 수 있고, 궁중의 명필이지만 변변한 기록이 없던 서기 이씨와 최혜영 상궁의 존재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지난 2019년 1월 재단이 입수한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들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였다. 덕온공주의 이야기뿐 아니라 유려한 한글 글씨체는 단연 화제가 됐다. 이어 4월 국립한글박물관에서는 기획특별전 '공쥬 글시 뎍으시니: 덕온공주 집안 3대 한글 유산'이 열렸다. 재단의 덕온공주 자료 환수 이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던 전시였지만, 새로 입수한 ‘자경전기’는 이 전시의 대표적인 유물로 528㎝에 달하는 긴 절첩본(折帖本)을 특별히 펼쳐서 전시하였다. 그해 말과 이듬해에 걸쳐서는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덕온공주 유물을 종합 조사·연구한 자료집이 발간되었다.
만약 2018년에 덕온공주 집안의 유물들을 들여올 수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언젠가는 돌아올 운명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더 늦어졌다면 지금과 같은 풍부한 이야기들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을 것이다.
효명세자빈 죽책과 덕온공주 인장, 그리고 덕온가의 한글자료들이 연속으로 국내에 들어왔다. 이 유물들의 주인은 애틋한 사랑을 표현하던 가족들이었다. 각 유물들을 입수하게 된 경위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연관성도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한 가족의 유물들을 다시 고향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공쥬 글시 뎍으시니' 특별전 개막식에는 덕온공주 집안 후손들도 함께하였고, 소중하게 간직해 온 귀한 유물들이 다시 모여 선보이는 경사를 함께 누렸다. 서로 오랜만에 만난 듯한 가족들의 반가운 얼굴을 덕온공주가 보았다면 참으로 흐뭇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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