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軍 성추행... "피해자는 최대 약자 '여성 부사관'이었다"

입력
2021.08.18 06:0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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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서울 용산구 국방부 국방컨벤션에서 열린 여군창설 6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여군들. 뉴스1

2017년 9월 서울 용산구 국방부 국방컨벤션에서 열린 여군창설 67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여군들. 뉴스1

석 달 사이 공군과 해군에서 연이어 터진 ‘성폭력 사망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여성 부사관’이었다.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군 조직에서 철저히 약자였다. 공군 A 중사가 피해 사실을 신고하고도 보호는커녕 회유와 협박 등 2차 가해에 시달렸던 것도, 11년 차 베테랑 군인 해군 B 중사가 진급 걱정으로 신고를 제때 못 한 것도 여성 부사관이라는 을(乙)의 지위 때문이었다.

여성 장교와 비교해도 처우는 열악하기만 하다. 부사관은 장교와 달리 장기복무 심사를 통과하기 전까지 정년을 보장받지 못하는, 이른바 ‘비정규직 군인’이다. 인사평가 권한을 쥔 상급자들이 진급을 구실로 죄의식 없이 성폭력을 가하고,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았던 까닭이다. 결국 성별(여성)과 신분(부사관)이 결합된 이중 차별의 굴레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통계도 성범죄에 노출된 여성 부사관들의 곤궁한 처지를 증명한다. 국방부가 2014년 국회 국방위원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성범죄 피해 여군 가운데 초급 간부인 하사가 59.5%로 가장 많았다. 국방부 관계자는 “군 성범죄 근절 대책은 최대 약자인 여성 부사관들의 처우 개선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했다. 혹시 모를 불이익을 우려해 신고를 꺼리는 환경이 지속되는 한 제2, 제3의 비극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여성 부사관에만 불리한 인사규정, 아무도 몰랐다

성추행 사실을 신고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해군 여성 부사관 빈소가 마련된 대전 국군대전병원으로 13일 근조화환을 운반하는 차량이 들어가고 있다. 대전=뉴스1

성추행 사실을 신고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해군 여성 부사관 빈소가 마련된 대전 국군대전병원으로 13일 근조화환을 운반하는 차량이 들어가고 있다. 대전=뉴스1

17일 국방부에 따르면 올 6월 기준 부사관은 전체 군 간부(약 17만 명)의 65.2%를 차지하는데, 이 중 여성 부사관은 6.8%에 불과하다. 여성 장교(9.9%)보다 비중이 작다. 한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은데다, 군 위계상 가장 말단에 위치하다보니 처우와 성폭력 같은 고통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게 이들의 고충이다.

복무기간 차별 규정이 대표적이다. 2016년 12월 군인사법(7조)이 개정되기 전까지 남성 부사관의 기본 복무기간은 4년인 반면 여성 부사관은 3년에 그쳤다. 3년 복무란 규정에는 이 기간 반드시 군인으로 살되, 장기복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전역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오랜 시간 남성 부사관에 비해 심사 기회가 한 차례 적은 불평등을 감수한 셈이다. 한 전직 여성 부사관은 “군 복무 3년은 사회에서 재취업하려 해도 별다른 경력으로 쳐주지 않는다”며 “더구나 여성 부사관은 직업 군인이 되겠다고 군대에 들어온 사람들이라 인사평가가 불합리해도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차별 규정을 군 수뇌부 상당수가 몰랐다는 점이다. 규정이 바뀐 것도 6년 전 국방부 여성 공무원이 여군들과 인터뷰하면서 잘못된 조항을 알게 돼 개정에 나선 덕분이다. 당시 개정을 주도한 담당 과장은 “불합리한 정책이 왜 생겼는지 알아보려고 각 군에 문의했더니 이유는커녕 그런 조항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남성 부사관에 비해 목소리 내기도 어려워

여성 부사관들이 인권침해 시 취한 조치. 그래픽=박구원 기자

여성 부사관들이 인권침해 시 취한 조치. 그래픽=박구원 기자

기준은 바로 세워졌지만, 별로 나아진 건 없었다. 군 내 소수자이자 약자란 지위는 물론, 상급자들의 지휘평가가 장기복무 심사와 진급을 좌우하는 현실도 그대로였다. 한 번 찍히면 좋은 평가가 나올 리 없는 구조적 병폐는 변하지 않은 것이다. 또 다른 전직 여성 부사관은 “군에 여성이 드물다보니 ‘어항 속 금붕어’처럼 일을 잘해도 관심병사 취급을 받는다”며 “가장 성공한 여성 부사관은 ‘눈에 안 띄게 숨죽이면서 부대원들과 섞이는 것’이란 푸념이 나올 정도”라고 했다. 김은경 젊은여군포럼 대표는 6월 한 정책세미나에서 “여군 개개인이 느끼는 차별은 제도적 차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시와 거리두기, 그리고 승진ㆍ보직에 영향을 미치는 편향적 인사평가, 심지어는 왕따까지 있다”고 증언했다.

관행적 차별은 침묵으로 이어졌다. 2018년 발간된 국가인권위원회의 ‘부사관 인권상황’ 실태 조사 결과, 여성 부사관 74.3%는 인권침해 피해를 겪고도 ‘그냥 참고 지나갔다’고 답했다. ‘즉각 시정 요구’ 혹은 ‘외부 제보’ 등 적극적 조치를 취한 응답자는 한 명도 없었다. ‘부대가 시끄러워지거나’(28.1%) ‘진급ㆍ인사 평정 불이익이 두려워서’(21.6%)였다.

이는 지난해 12월 남성인 주임원사가 주축이 돼 “장교들이 부사관들에게 존댓말하는 것을 고맙게 여기라”는 남영신 육군참모총장의 발언을 문제 삼아 인권위에 제소한 사례나, 병사들이 4, 5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부실급식을 폭로한 것과도 대비된다.

인사 지원책 없이 출산·육아 지원만

서욱 국방부 장관이 1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욱 국방부 장관이 1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태를 모르니 지원책은 당연히 겉돌았다. 국방부가 그간 발표한 여군 처우 개선 대책 대부분은 △여군 규모 확대 △여군 지휘관 증가 △출산ㆍ육아휴직 활성화 등 현장에서 활동하는 여성 부사관들의 실질적 권익 신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여성 장교만 해도 지휘관으로 진급하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돼 조직에서도 이들 인사는 관리 대상이지만, 여군 부사관은 장기복무 심사자 숫자부터 매년 들쭉날쭉하는 등 예측 불가한 인사정책 탓에 불안감이 훨씬 크다”고 지적했다. 여성 부사관들의 안정적 복무여건 마련이 절실한 이유다.

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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