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살은 풋살이라 괜찮아

입력
2021.08.17 22:00
27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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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나 더위가 조금 가시기 시작했던 어느 여름날의 풍경이 있다.

모시옷을 입은 동네 할머니들이 주정차된 차들 사이에 놓인 파라솔 의자에 나란히 앉아 부채를 부치다 집으로 향하던 엄마와 나를 발견하곤 반갑게 부채를 흔들며 아는 체했다. 반팔 차림의 엄마가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다 "옷이 짧아서 허리가 좀 보이네요" 멋쩍게 얘기하자, 할머니는 "에이, 뭣이 어쩐대. 여름 살은 풋살이라 내놔도 괜찮아. 젊은디 뭘. 젖가슴을 내놔도 욕 안 해"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할머니도 "그라제. 시아버지가 와도 뭐라 못 하제" 하며 단호하게 거들었다.

부채질을 하는 할머니의 흰 모시 옷 그 사이로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에게 "보기 숭하제"라고 물었고, 다른 할머니는 "보기 숭하긴. 풋살은 괜찮어" 하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풋과일, 풋내기 같은 단어들의 접두사인 풋-을 떠올리며 어림잡아 여물지 않은 속살이라 드러내도 예쁘다는 관용적 표현인 줄로 이해했는데, 최근에야 실제 뜻은 여름철에 노출하는 것을 질타하는 의미의 속담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여름 살은 풋살'이라는 속담이었고, 괜찮다는 형용사는 붙어 있지 않았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엄마, 그때 할머니들이 풋살이라 괜찮다고 했던 거 기억나?"라고 물으며 "그 말이 틀린 말이더라" 하자,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 할머니들은 항상 그렇게 말하던데, 틀린 말을 잘못 알고 있을 뻔했네"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풋살이라 괜찮다는 말이 통용되는 곳이라 더 좋았다. 그것은 우리만 알 수 있는 무해하고 그리운 표현이니까.

내 일상은 대개 이런 식이다. 나는 거대한 사건보다 이런 작은 이야기들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스스로 남기는 말을 잊어버리곤 한다. 내가 다시 꺼내려 하면, 그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왜 자꾸 반복해서 묻느냐고 답한다.

나는 정작 중요한 모든 것들은 역설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 힘주어서 하는 이야기 그 속이 아닌, 대개 빛나는 것들은 흔해서 잊고 있던 것들 안에 나동그라져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사소하고 금세 휘발되어 버리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자꾸 그 풍경을 곱씹게 된다.

물론 내가 창작자이기 때문에 이런 일상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연유도 있을 것이다. 굵직한 사건은 상상에 기대어 만들 수 있겠으나 이런 사소한 일상은 도무지 경험하거나 듣지 않고선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깐. 휘발되는 그들의 이야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언젠가 영화 속 인물의 입을 빌려 그 순간의 평화로움과 관용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전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이 대사는 영화를 본 관객들과 '우리'만 알 수 있는 농담이 될 것이다.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 아니라 실제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영화의 장면으로 담아내기 위해선 우선 할머니들보다 입담이 좋아야 할 것이고, 무해한 농담을 건넬 수 있는 관록도 갖춰야 할 것이다.

이제 막 첫 장편영화를 마친 나는 아무래도 관록보다는 풋-이 붙어야 할 사람이라 자평할 수밖에 없지만, "뭣이 어쩐대. 풋살이라 괜찮다"는 말을 이따금씩 되새기며 나아갈 수밖에. 새로운 이야기와 여전히 휘발되는 일상들 그 사이에서 발붙이고선 좋은 농담을 건넬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윤단비 영화감독·시나리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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