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훈련의 레토릭

입력
2021.08.17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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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2019년 3월 2일 베트남 호찌민의 묘소 헌화식에 참석한 모습. 평양=AP 뉴시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2019년 3월 2일 베트남 호찌민의 묘소 헌화식에 참석한 모습. 평양=AP 뉴시스


“한미연합군사연습(한미훈련)은 연례적이고 방어적인 훈련으로 특정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정치적 ‘레토릭’에 가깝다. 한미훈련은 통상 1, 2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1부는 방어 훈련이고, 2부는 한미의 병력을 북상시키며 북측 민심을 어르고 달래는 소위 '안정화 작전'이 포함돼 있는 점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훈련 시나리오의 시작은 북한의 대남 선제 공격이지만, 결말은 한미의 북측 영토 수복인 셈이다. 따라서 “한미훈련은 침략전쟁연습”이라는 북한의 주장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한미훈련을 '중단'해야 한다”는 북한과 남측 일각의 요구가 마냥 합리화되는 것도 아니다. 휴전 이후 남측의 대북 군사 태세는 주한미군은 물론 본토 증원 병력까지 더해진 ‘연합사 체제’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한미훈련을 중단하려면, 유사시 작전 개념을 한국군 중심으로 바꾸는 ‘대수술’이 필요하다. 설사 한국군 중심 대응 시나리오가 가능하더라도 북핵 위협은 핵전력이 없는 한국군 혼자의 힘으로 상쇄하기 어렵다. 독자적 핵무장을 하든지 이것이 힘들다면 동맹을 통한 대북 군사력 억제, 즉 한미훈련은 불가피하다.

한미훈련을 중단했던 전례가 없진 않다. 양국은 1992년 키리졸브(KR)연습의 전신 격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일시 중단한 바 있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직후다. 비핵화 협상이 굴러갈 때였고, 한미훈련은 북한의 비핵화 움직임에 대한 상응 조치라는 명분으로 유예될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래 북미 간 어떤 비핵화 협상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재로선 훈련이 중단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미훈련에 이골이 난 북한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더욱이 훈련 개시 수일을 앞두고 중단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는 점 역시 북한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공식 담화를 통해 ‘훈련 중단’을 요구한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 역시 '레토릭'에 가깝다. 훈련 유예가 진짜 목적이 아니라, 훈련을 결국 유예하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 남북 간 통신선 복원에 합의한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란 뜻이다.

하나는 향후 바이든 행정부와의 비핵화 협상에 앞서 몸값을 키워두겠다는 것. 한미훈련 중단은 물론 주한미군 철수 등 원론적인 입장을 새삼 띄워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비핵화 가격’을 제시한 것이다.

군사 도발을 위한 명분 축적의 의미도 지닌다. 최근 잇따른 북측 담화를 요약하면, "남북 간 신뢰 구축을 위해 통신선 복원에 합의했지만, 남측이 기대를 저버리고 훈련을 강행했다. 따라서 우리도 군사적 대응에 나설 것이다" 정도일 듯하다. 이런 흐름에서 보자면, 남북 간 통신선 복원은 군사 도발의 명분을 쌓기 위한 ‘미끼’였던 셈이다.

문재인 정권 후반기의 남북관계를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대화 노력을 멈춰선 안 되고, 안정된 남북관계를 지렛대로 북미 간 협상을 유인하려는 노력도 계속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의 선의가 '위장 전략’일 가능성조차 의심하지 못한다면, 백날 대화해봐야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통신선 복원에 합의해 놓고, 수일 만에 “엄청난 안보 위기를 시시각각 느끼게 해줄 것”이라는 북한의 겁박을 듣고 있어야 하는 지금이 딱 그렇다.




조영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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