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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아프간, 탈레반 손 안에… 미군 떠난 정부 "평화적 권력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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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이 20년 만에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탈레반의 손에 넘어갔다. 이달 말 미군의 완전 철군을 앞두고 국토 대부분은 물론, ‘최후의 보루’인 수도 카불마저 반군 손에 넘어갈 상황에 이르자 정부가 백기를 들었다. 이에 따라 2001년 세계 패권국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시작된 아프간 재건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미국은 ‘제2의 베트남 패전’이란 치욕을 쓰게 됐다. 탈레반과 미국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측의 협상도 조만간 본격화할 전망이다.
15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압둘 사타르 미작왈 아프간 내무장관은 이날 “과도 정부에 평화적 권력 이양이 있을 것”이라며 탈레반에 사실상 항복을 선언했다. 이번 결정은 탈레반이 카불 외곽에 진입한 지 1시간 만에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이들은 수도 입성 후 추가 진입을 유예하고, 대통령 궁에서 정부 측과 정권 이양 협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백기투항 소식이 알려지고 수분 뒤에는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향후 몇 시간 이내에 자리에서 물러날 예정이며, 알리 아마드 자랄리 전 내무장관이 새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내정됐다”는 현지 매체의 보도도 나왔다.
현재 가니 대통령은 아프간을 떠나 타지키스탄으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레반은 이날 오후 대기 중이던 전투원들에게 카불 시내 진입을 명령했다. 대통령에 이어 지역 경찰마저 초소를 버리고 떠나자 ‘치안 공백’ 상태에 따른 약탈을 막기 위해서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전투원들이 대통령궁까지 진입했다고 전했다.
탈레반의 재집권은 9ㆍ11 테러 직후인 2001년 11월 13일 미군이 수도 카불을 점령한 이후 약 20년 만이다. 사실 이들의 정권 탈환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반군은 이미 이날까지 아프간 34개 주도(州都) 가운데 25곳에 깃발을 꽂았다. 전날에는 북부 최대 도시이자 반(反)탈레반 거점 도시인 마자르-이-샤리프와 카불의 ‘동쪽 방어벽’인 잘랄라바드마저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아프간 정부가 카불 수성을 위해 주변 지역에 군사력을 집중했지만, 이렇다 할 교전 없이 무력하게 밀렸다. 일부 도시의 경우 정부군이 저항을 포기하면서 반군이 무혈 입성하기도 했다.
다만 정국 장악 시기는 예상보다 빨랐다. 당초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카불 함락 시점을 미군 철수 이후 6~12개월로 예상했다. 상황이 급변하자 미 정보당국은 이를 철수 한 달 정도로 앞당겼다. 그러나 탈레반은 공세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6일 님로즈주(州) 주도 자란지를 점령한 이후 아흐레 만에 수도 진입에 성공했다.
일단 탈레반이 “누구에게도 복수할 계획이 없다”며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약속한 만큼 다소 유화적 제스처를 취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실제 이날 탈레반 측은 과도정부 구성 합의 직후 “공항과 병원은 계속 운영될 것이며 긴급 물품 공급 역시 중단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 카불 내 외국인 철수를 두고도 “원할 경우 현지를 떠나거나 새 정부에 등록해야 한다”며 사실상 용인키로 했다. 해산 예정인 정부군 병사들의 귀향 역시 허용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들의 온건 발언에도 불구하고 반군의 압제적 통치를 피해 국외로 떠나려는 ‘아프간 엑소더스'(대탈출)는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이날 카불 주재 대사관 외교관들의 철수를 시작했다. AP통신은 “대사관으로 헬기가 뜨고 내리는 움직임이 포착됐고, 민감한 문서를 태우는 듯 지붕에 연기가 피어올랐다”고 전했다. 영국도 아프간 주재 외교관을 비롯해 3,000여 명의 자국민을 대피시키기로 했고, 독일은 직원 대피 시기를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자산가들 역시 도피에 나섰다. 이날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는 해외로 탈출하려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현지 항공사 항공편은 다음 주까지 예약이 꽉 찬 상태다. 이들이 앞다퉈 달러 사재기와 현금 인출에 나서면서 아프가니ㆍ달러 환율은 지난주 달러당 80아프가니에서 100아프가니로 25%나 급등했다.
외국으로 떠날 형편이 안 되는 시민들의 상황은 처참하다. 최근 탈레반 점령지에서 강제 징집과 강제 결혼 등 ‘인권 시계’가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이어지자 주민 약 12만 명은 무장조직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카불로 몸을 피해왔다. 반군의 정권 장악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이제 이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고국을 등지거나, 탈레반의 공포 정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히 이날 미국이 철군 계획에 변함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만큼, 탈출 행렬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로이터통신은 미 정부 고위관계자를 인용해 “탈레반이 (미국인들의) 철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미군의 계산법(전략)엔 아무 변화가 없다”고 전했다.
사태가 급변하자 현지 한국대사관 역시 일시적으로 문을 닫기로 했다. 외교부는 이날 밤 “아프간 상황이 급격히 악화하면서 현지 주재 대사관을 잠정 폐쇄키로 결정하고, 공관원 대부분을 중동지역 제3국으로 철수시켰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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