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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영상산업의 낡은 질서부터 바로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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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영상산업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가속화한 OTT 중심의 시장 변화의 충격이 가시화되고 있다. 넷플릭스의 성장은 국내 사업자가 주축이 되는 IPTV 중심의 방송영상 플랫폼의 안정적인 지위를 뒤흔들어 놓았다. 오리지널 콘텐츠를 기반으로 새로운 세대를 위한 IP를 축적해온 기업들은 플랫폼 변화를 틈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영상 플랫폼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오리지널 콘텐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커지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 융합에 따라 미디어 간의 차별점은 약화되고 있고, 콘텐츠 지식재산(IP)과 팬덤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의 중요성은 과거보다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방송영상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정작 국내 영상 사업자들의 제작 여건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방송 산업은 영상 콘텐츠 창작을 위해 여전히 핵심적인 기반이 되고 있지만, 정작 이 시장에서 콘텐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재투자의 여력을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콘텐츠 제작에 투자하기 위해선, 실제로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이 돈을 벌 수 있어야 하고, 투자에 대한 계획을 합리적으로 세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내의 유료방송 시장이 저가의 상품 중심으로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실제 콘텐츠를 공급하는 채널 사용 사업자(PP, Program Provider)들은 충분한 협상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얼마 전 발의된 방송법 개정안에는 채널 사업자와 플랫폼 사업자 간의 공정 거래 질서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내용은 간결하다. 정당한 사유 없이 방송사업자와의 프로그램 공급 계약 체결을 직전년도 계약 만료일 이전에 완료하지 않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업에서 공급을 위한 계약이 이루어지고 이후에 실제 공급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유료방송 시장에서는 먼저 콘텐츠를 공급한 뒤 이후에 계약이 이루어지는 관행이 지속되어 왔다. 기존에 가이드라인 수준의 권고로 개선되지 않던 관행을 법제화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이 법안에 대한 의견을 살펴보면 합의가 가능한 지점과 논쟁이 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기존의 관행이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선 특별한 이견을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는 이 법안을 통해 과거보다 협상력이 강해진 일부 대형 PP들의 우선 협상으로 인해 중소 PP들이 오히려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이다. 프로그램 사용료의 재원이 한정되어 있고, 방송산업의 변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단기적으로 이를 타개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분명 이러한 우려에 대해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관행을 유지하는 것이 중소 PP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인지에 대해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방송영상 산업은 국내 사업자 중심의 안정적이던 시장 구조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격변의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콘텐츠 측면의 경쟁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새로운 글로벌 사업자들과의 경쟁 속에서 산업 전체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 낡은 관행은 당장은 익숙한 질서를 유지해줄 수 있을지 모르나, 근본적인 커다란 변화로부터 새로운 대응의 기회를 제공하진 못한다.
유료방송 시장의 위축에 대한 우려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콘텐츠에 투자할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는 콘텐츠 사업자들이 충분히 콘텐츠에 투자하기 어려운 구조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콘텐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역량 있는 인재들이 들어와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
미디어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글로벌 OTT 사업자들의 시장 침투가 확대되는 상황은 국내 영상 미디어 콘텐츠 산업의 핵심 경쟁력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OTT 사업자가 TV 앞에 놓인 '관문'과 같은 유료방송의 틈새를 깨뜨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산업의 지형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과거와 같은 안락한 환경은 유지되기 어렵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시기에 한 번 '실기'하면 다음 기회는 잘 오지 않는다. 지금 미디어 콘텐츠 산업의 지형 변화는 몇 년 만에 찾아온 혁명적 수준의 변화다. 한국의 방송영상산업은 지속적인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구조를 갖출 수 있을지, 아니면 내부적 비효율과 불공정의 문제로 탄력을 잃을 위기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여러 이유에서 비정상적으로 형성된 관행을 바로잡는 일은 늘 고통스러운 조정을 수반하게 된다. 고통이 없는 개혁은 없다. 중요한 것은 고통의 유무가 아니라, 그 고통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냐일 것이다. 조금은 두려워 보이지만 그것이 맞는 길이라면, 그 필요가 보일 때, 그리고 아직 여력이 남아 있을 때, 그래서 그렇게 짜인 새로운 판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앞으로의 변화 속에서 정말로 콘텐츠가 중요하다면, 우리의 핵심적인 목표는 '콘텐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 다가올 변화를 기회의 흐름으로 만들어 가는 일은 낡은 질서를 바로잡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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