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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된 사진관… “사진은 추억상자, 생 다할 때까지 지켜야죠”

입력
2021.08.14 08:00
수정
2021.08.14 08:1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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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포천 새한칼라
6·25 전쟁 중 군부대 근처에 개업
하루 100여명 넘은 손님 북새통
남편 떠난 2013년부터 홀로 운영
사진 보정·편집 등 배워 능수능란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포천 사진관 '새한칼라'를 지키고 있는 창업자의 며느리 김순희씨. 그는 "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이곳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포천 사진관 '새한칼라'를 지키고 있는 창업자의 며느리 김순희씨. 그는 "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이곳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언제나 생각나면 꺼내 보는 추억 상자.”

경기 포천에서 새한칼라스튜디오(새한칼라)를 운영하고 있는 김순희(71) 대표가 내린 사진의 정의다. 즉석카메라에 이어 스마트폰 카메라가 판을 치는 세상. 사진관 주인은 맥이 빠져 있을 법도 했지만, 말에 힘이 묻어났다. 그가 거의 매일 나와 지키고 있는 새한칼라는 70년 역사를 가진 사진관. 김 대표 앞에선 20년, 30년 정도 된 가게는 명함도 못 내민다. 김 대표는 “긴 세월 동안 우리 사진관에서 추억을 쌓은 사람들을 떠올리면 뿌듯하다"며 “그들에게 추억 상자를 선사한 우리 사진관은 나와 우리 가족의 삶을 지탱해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전쟁통에 문 연 사진관 ‘문전성시’

9일 찾은 새한칼라는 포천의 명물 이동갈비집이 즐비한 대로의 이면도로에 자리 해 있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은 그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돼 보였다. 다방, 여관, 양장점 등 족히 수십 년은 돼 보이는 가게 간판부터 최신의 피자집까지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뉴트로’(신복고) 정취도 녹아 있는 골목이다.

배면도로 중간 1층짜리 흰색 건물로 들어서자 잘 정돈된 사진관에서 백발의 김 대표가 웃으며 반긴다. 디지털 카메라 한 대와 조명등이 설치된 내부는 여느 사진관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김 대표가 전한 새한칼라 역사는 한국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특별했다.

시아버지가 예전에 쓰던 기계식 카메라 렌즈 속으로 김순희씨가 보인다. 그는 70년 역사를 가진 포천 사진관 '새한칼라'를 홀로 지키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시아버지가 예전에 쓰던 기계식 카메라 렌즈 속으로 김순희씨가 보인다. 그는 70년 역사를 가진 포천 사진관 '새한칼라'를 홀로 지키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그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이어 10년 가까이 새한칼라를 운영하고 있다. 시아버지인 고 임오길(1912~1987)씨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사진 기술을 익혀 30대 때 중국 만주에서 사진관을 열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자 1950년 10월 지금의 포천 이동면 파출소 옆에 '장암사진관'을 개업했다. 새한칼라의 전신이다. 군부대가 많아 사진관 위치로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입대·전출입·제대 사진을 찍으려는 군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통이라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려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김 대표는 “매일 100명이 넘는 손님이 찾아와 사진관 안은 늘 북새통이었다고 한다”며 “시아버지는 당시 동네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어 집을 세 채나 장만했다”고 했다.

임오길씨는 ‘한국인상사진작가협의회’에 소속된 1세대 프로작가였다. 사진관이 대박을 치자, 웨딩사진을 겸할 수 있는 결혼식장까지 개업하는 등 수완이 좋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초장기 카메라인 원판필름 방식의 토요뷰(TOYO VIEW)를 들고 다양한 고객의 모습을 담아 사진으로 건넸다.

1971년 임씨 집안으로 시집온 김 대표는 자연스럽게 사진관 일을 도왔다. 사진관 한쪽에 차려진 암실에서 필름 인화작업도 돕고 사진을 말리고 재단하는 일도 거들었다. 당시 사진관은 고객이 가져오거나 직접 촬영한 필름을 현상, 인화하는 일도 했다.

70년 역사를 가진 포천 사진관 '새한칼라'를 개업한 임오길씨. 왕태석 선임기자

70년 역사를 가진 포천 사진관 '새한칼라'를 개업한 임오길씨. 왕태석 선임기자

그는 “첫아이를 등에 업고 이리저리 뛰며 사진관 일을 도왔다”고 말했다.

1987년 시부가 세상을 떠나자 사진관은 온전히 김씨 부부의 몫이 됐다. 남편 기굉씨가 주로 출장 촬영을 맡았고, 김 대표는 사진관을 찾는 고객을 맞았다. 남편도 아버지를 따라 사진을 공부한 프로 작가였기에 2세 경영시대는 순조로웠다. 남편은 1991년 사진관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간판도 새한칼라로 새로 달았다.

사진관은 날로 번창했다. 촬영기사만 3명을 고용할 정도로 일이 밀려들었다. 사진 기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면서 인근 학교의 졸업 앨범을 도맡다시피 했다. 남편은 원판 필름방식에서 진화한 기계식 필름카메라를 썼다. 대를 이어 운영한 새한칼라는 그렇게 동네의 터줏대감이 됐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진은 인물이 선명하게 드러나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부자는 모두 한국인상사진작가협의회가 인정하는 프로 인물 사진 작가. 인물사진 분야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예전에 쓰던 손때 묻은 기계식 카메라들. 왕태석 선임기자

시아버지와 남편이 예전에 쓰던 손때 묻은 기계식 카메라들. 왕태석 선임기자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1950년대 원판필름 카메라들이 새한칼라에는 소중하게 보관돼 있다. 그 옆에는 새한칼라에서 촬영한 예전 고등학생들의 졸업사진이 놓여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1950년대 원판필름 카메라들이 새한칼라에는 소중하게 보관돼 있다. 그 옆에는 새한칼라에서 촬영한 예전 고등학생들의 졸업사진이 놓여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터줏대감 사진관의 특별한 사연들

새한칼라는 포천에선 가장 오래된 사진관이다. 그만큼 특별한 사연도 많다. 김 대표가 갓 시집왔을 때인 1970년대 중반 같은 동네에 사는 70대 노모가 아들 결혼사진 촬영을 의뢰할 때의 일이다. 노모는 “아들이 폭발사고로 시력을 잃고 눈을 뜰 수가 없는데, 결혼사진엔 아들이 눈을 떴으면 좋겠다”며 부탁해왔다. 사진 보정기술이 없던 당시로선 난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남편과 함께 붓과 수정연필로 수차례 연습한 끝에 사진 속 신랑 얼굴에 눈을 그려 넣는 데 성공했다. 김 대표는 “사진을 받아 본 노모가 ‘아들이 눈을 떴다’며 눈물을 왈칵 쏟는데, 가슴이 먹먹했다”고 회상했다.

군인과 얽힌 추억거리는 산더미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사관들이 양복도 제대로 해 입지 못한 채 올리던 합동결혼식 모습을 찍던 날, 가깝게 지내던 위관급 소대장이 별을 두 개를 단 사단장으로 다시 찾아와 ‘사진 한방 찍어 달라’고 했던 일까지 모두 소중하다.

아련한 기억도 있다. 한번은 30대 한 남성이 사진관 밖에서 머뭇머뭇 서성이기에 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력서를 내야 하는데 사진 찍을 돈이 없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한다. 김 대표는 “‘돈은 나중에 내라’며 사진 먼저 찍어주니, 그때서야 환하게 웃으며 돌아가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누구나 어렵고 못살던 시절이었기에 사진값을 내지 못하는 고객이 부지기수였다”며 “자신의 결혼식 사진값을 25년이 지나 딸 결혼식 때 준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남편이 의문사 사건 현장에 투입된 적도 있었다. 기굉씨는 1975년 8월 17일 새벽 포천 약사봉에서 독립운동가 장준하 선생 시신이 발견됐을 당시 경찰의 협조 요청으로 이틀간 장 선생 시신은 물론 사고 현장 곳곳을 사진으로 남겼다고 한다.

인근의 이동갈비전문점을 운영하는 김근자(73)씨는 “동네 60대 이상 노인들은 거의 이 사진관에서 결혼사진을 찍었을 정도로 고마운 공간”이라고 말했다.

주변에 군부대가 많은 특성상 새한칼라에는 유독 군인 고객이 많다. 왕태석 선임기자

주변에 군부대가 많은 특성상 새한칼라에는 유독 군인 고객이 많다. 왕태석 선임기자


2대 며느리가 지켜내는 사진관

김 대표는 2013년부터 사진관을 홀로 운영하고 있다. 평생의 반려자인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다. 카메라 기능이 탑재된 스마트폰이 널리 퍼지면서 사진관이 사양 산업으로 내몰리는 급변기를 혼자 꿋꿋하게 이겨냈다. 그는 “우리 가족의 혼이 담긴 사진관을 지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손때 묻은 옛날 카메라들을 꺼내 보였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주름 달린 원판필름 카메라부터 일본 필름카메라(Mamiya RB67)까지 다양했다. 길게는 70년,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김 대표는 예전 카메라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삶의 흔적이 녹아 있고, 수만 명 고객의 희로애락이 담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 때문이다.

손님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50년 가까이 사진관 일을 돌보며 어깨 너머로 사진 찍는 기술을 익힌 그는 디지털카메라 시대에 걸맞은 포토샵, 파워포인트 등 다양한 이미지프로그램을 배우고 있다. 칠순을 넘긴 나이지만, 사진 보정, 편집, 그래픽 디자인까지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는 “2012년엔 정보자격기술(ITQ) 자격도 취득했다”며 “사진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면서 사진관이 설자리를 잃고 있는 현실에도 그는 사진관 일을 놓을 생각이 없다. “내가 사진관 문을 열지 않으면, 우리 가족은 물론 그 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공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니, 생이 다할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싶어요."

70년 역사를 가진 포천 사진관 '새한칼라', 왕태석 선임기자

70년 역사를 가진 포천 사진관 '새한칼라', 왕태석 선임기자



이종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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