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속 애호박은 왜 비닐을 입고 있을까 

입력
2021.08.12 14:00

서울 중구 서울역 지하도에 설치된 강원도의 농산물 광고. 애호박에만 비닐이 씌워져 있다. 이진희기자

서울 중구의 서울역 지하도.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로 한쪽 벽에서 커다란 농산물 광고를 볼 수 있다. 강원도의 '강원농협연합사업단'이 도 지역에서 키운 각종 농산물을 보여준다. 오이, 방울토마토, 피망, 깻잎들 중에 유독 애호박만 답답한 비닐옷을 입고 있다.

보통 마트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긴 하다. 소비자들은 마트 등에서 유독 꽉 낀 비닐(플라스틱 필름)로 낱개 포장된 애호박을 보았을 것이다. "왜 이렇게 단단히 포장했지?"라고 의아할 수 있지만, 이는 키울 때부터 외모를 일률적으로 교정하기 위해 씌운 '성형 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각한 환경 위기 속에서도 겨우 농산물 모양을 균일하게 만든다는 명목으로 막대한 비닐을 쓰고 버리는 게,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비닐 포장이 된 인큐 애호박(왼쪽)과 비닐이 없는 애호박이 나란히 놓여 있다. 두 애호박은 같은 농장에서 길러 같은 날 수확했다. 자연성장한 오른쪽의 애호박이 더 크고 맛도 좋고 심지어 싸지만, 유통업체에선 받아주는 곳이 거의 없다. 한진탁 인턴기자

애호박에 씌운 비닐은 포장인 동시에 ‘성형 틀’이다. 정식 명칭은 ‘인큐 비닐’. 아기를 넣어 키우는 인큐베이터처럼, 꽃이 갓 떨어진 어린 애호박에 비닐을 씌워 곧은 모양으로 자라게 한다.

애호박 성형은 21세기 초반에 시작됐다. 처음은 2000년 등장한 ‘태극 애호박’. 단단한 플라스틱 통에 어린 애호박을 넣어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모양으로 재배해서 판매했다. 그러다 2004년 인큐 비닐이 개발됐다. 곧은 모양을 만들면서 벗겨낼 필요 없이 포장 역할을 하는 비닐 틀은 널리 퍼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평균 호박 생산량은 약 20만 톤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호박 생산량의 90%가 애호박이니 매년 18만 톤의 애호박이 수확되는 것이다. 애호박 한 개가 300g이라고 치면 매년 약 6억 개가 재배됐다.

인큐 애호박이 등장한 시점으로 계산하면 16년간 약 96억 개가 생산된 것이다. 비닐을 안 씌운 애호박이 통계에 포함된 걸 감안하더라도 매년 수억 개의 비닐이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이 비닐은 대부분 복합 플라스틱인 아더(other) 재질이다. 물질 재활용은 사실상 불가능해 대부분 소각ㆍ매립됐을 가능성이 높다.

기후위기와 쓰레기 문제 속에서 이런 인큐 애호박은 퇴출돼야 하지만, 농민들은 쉽지 않다고 하소연한다. 비닐을 안 씌우면 판로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마트 등 주요 유통업체들이 인큐 애호박만 찾는다. 유통업체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변화하지 않는 한 이런 불합리한 현실은 바뀌기 어렵다.

맛과 영양 등에서도 비닐 없이 키운 자연생성 애호박이 더 낫다고 한다. 똑같은 밭에서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영양에는 큰 차이가 없고, 오히려 맛은 자연 그대로 키운 쪽이 더 좋다는 것. 강원도 화천의 애호박농가연합인 병풍산 작목반의 박상준 총무는 “애호박에 비닐을 씌우면 온실 역할도 해서 좀 더 빨리 자라는데, 이런 속성으로 키운 애호박보다는 그냥 호박이 더 단단하고 맛이 좋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인큐 애호박 재배가 지속되는 건 상품성과 관리비용 절감을 추구하는 대형마트의 유통방식 탓이 크다. ‘못난이 농산물’ 전문 유통업체인 프레시어글리의 박성호 대표는 “마트에서는 소비자가 직접 상품을 고르기 때문에 균일가를 맞추려 특정 규격의 채소만 선호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는 품질에 이상이 없어도 생김새가 울퉁불퉁하거나, 심지어 규격보다 작거나 큰 것까지 ‘B급’으로 취급된다”고 비판했다.

자연성장 애호박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실. 광고판에서조차 이제는 애호박에 비닐이 씌워진 이유이다.

신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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