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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발원지, 튀니지서 확산하는 반동·반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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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14일은 경제적 부패에 항거한 '존엄성 혁명'(일명 재스민혁명)의 성공으로 벤 알리 당시 튀니지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한 지 10년이 된 날이다. 그간 튀니지에선 리더십과 정치·경제 체제의 변화가 상당 부분 이뤄졌다. 헌법과 인권·민주화 관련 법률도 개정됐다. 그럼에도 그날의 혁명이 완전히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최근 튀니지 정국은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지난달 25일 카이스 사이에드 튀니지 대통령이 히셈 메시시 총리를 해임하고 의회 기능을 정지시킨 후 빠르게 모든 권력을 장악하면서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는 '아랍의 초봄' 정도에 머물러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은 확산 속도와 범위,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 있어 프랑스 대혁명보다 위대한 혁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혹자는 베를린 장벽 붕괴에 비유하기도 했다. 자유와 평등을 요구한 '가치의 혁명'이었고, 절대빈곤·청년실업·양극화 해소를 요구한 '빵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특권적 지배질서인 '앙시앵레짐'(구체제)에 대한 항거에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이 곧바로 반(反)혁명에 직면했듯 '아랍의 봄'도 비슷한 위기를 맞았다. 각 국가마다 형태는 다르지만 옛 제도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거셌던 것이다. 당시 튀니지 뒤를 이어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다른 아랍 국가 대부분은 일찌감치 △신군부 권위주의로의 회귀(이집트) △내전(시리아·이라크·리비아·예멘) △경제적 궁핍에 대한 반정부 시위 급증(이란·수단·레바논) 등 '아랍의 겨울'을 맞았다. 일종의 아랍식 '희망 고문'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혁명 초기의 폭발적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로 변해 버렸다.
'안정적' 독재 체제를 지지하는 경향이 대표적이다. 이번 튀니지 사태도 그랬다. 재스민혁명 이후 지속된 정치 불안정과 경제난이 시위와 폭동을 다시 불렀고, 이는 '독재자 벤 알리 시대'에 대한 향수를 키웠다. 사이에드 대통령이 총리 해임 등을 단행할 수 있는 힘을 준 셈이다. 현재 튀니지는 아프리카에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최다 사망자를 낸 국가들 중 하나로,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다.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튀니지의 혁명 열망은 어느 곳보다도 강했다. 2010년 12월 17일 작은 도시에서 어머니와 6명의 형제자매를 부양하던 26세 청년 모하메드 부와지지의 분신 자살은 그 열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노점상을 하던 그는 외상으로 받아 온 물건을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속반원에게 뺏기자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이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 방송과 1인 미디어에 의해 전해지면서 민주화 혁명은 전 아랍 사회에 들불처럼 번졌다.
당시 튀니지를 포함한 아랍 사회는 권위주의 체제 속 만연한 부정부패, 부의 편중, 경제난 등으로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2008년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글로벌 경제 위기가 아랍 세계의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치면서 '아랍의 봄'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줄리언 어산지의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벤 알리 일가의 부패상은 '튀니리크스'를 통해 퍼졌고, 아랍 언론과 1인 미디어까지 가세하자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에 따르면, 서구 유럽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역사는 몇 차례의 물결을 일으켰는데, 아랍의 봄은 제4의 민주화 물결이다.
안타깝게도 2011년 독재자가 물러난 후 상황이 급변하지 못했다. 여전히 부패는 심각했고 청년 실업률도 높았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사회 불안은 다방면에서 불거졌다. 2011년 10월 총선 때 온건 이슬람주의 이념을 가진 엔나흐다당이 국회의원 전체 217석 중 89석을 차지하고, 같은 해 12월엔 몬세프 마르주키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이슬람 국가로 향하고 있다'는 정치적 우려가 심화했다. 이후 정치권은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가 번갈아 정권을 잡으면서 삐걱거렸다. 협치를 약속한 적도 있지만 뜻대로 되진 못했다. 2014년 10월 세속주의 정당인 니다 토네스당이 국회 다수를 차지한 후 엔나흐다당과 연대했고 두 달 후 대선에서 세속주의자 베지 카이드 에셉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일종의 세속주의와 온건 이슬람주의 간 협치의 결과였으나 이념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연대는 무너졌다.
경제적 어려움도 계속 튀니지 사회를 흔들었다. 2012년 4월부터 주로 남서부 탄광 지역에서 실업자 수천 명이 시위하면서 경찰과 충돌했고, 같은 해 6월과 8월에는 극단 지하디스트(이슬람 근본주의 무장 투쟁 조직)들이 합류한 더 큰 규모의 폭력 시위가 발생했다. 연속적 파업과 시위는 산업과 공공서비스, 운송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2018년 초에는 정부의 긴축예산 집행으로 항의가 분출한 적도 있다. 그 와중에 72명의 외국인 관광객과 보안요원이 사망한 2015년 이슬람국가(IS)의 테러, 20명이 숨진 지하디스트들의 2016년 보안시설 테러 등은 치안 불안을 키웠다.
사이에드 대통령은 이런 정치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가진 튀니지 국민들이 '기존 정치권과 다른 인물'이라는 기대감을 품으며 선택한 인물이다. 2019년 10월 당선된 그는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무소속 보수주의 후보였다. 그러나 지난 3년간 온라인 블로거 1,500~1,700명이 기소됐다. 정부에 반하는 콘텐츠를 올렸다는 이유였다. 올해 3월엔 온라인상에서 정부를 비판하고, 항의 시위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튀니지 경찰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동가들을 체포했다. 경찰의 과도한 폭력으로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다. 억압적 사회 구조가 여전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민주화로의 진보를 경험한 아랍인들이 민주화를 포기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 열망과 민주화 운동의 경험은 사회 곳곳에 희망의 불씨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공독재, 개발독재, 살인독재로 한국 민주주의가 수십 년 지체됐으나 1987년 민주항쟁, 2017년 촛불혁명을 통해 더욱 튼튼해진 것과 같다.
'아랍 예외주의'로 폄하된 아랍의 민주주의도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랍의 봄 이전과 이후, 몇 차례 튀니지를 방문하면서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명확히 목도했다. 혁명 이후 10년간 정부가 9번이나 바뀌는 동안 정국은 불안했지만, 시민사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진전도 있었다. '과도기적 정의(재판)에 관한 법'(2013년), '여성 폭력 배제법'(2017년), '인종차별 금지법'(2018년) 등이 그 결과물이다.
민주평화론에 따르면, 아랍의 봄의 성공은 중동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은 길고도 험한 여정 후에 열릴 것으로 보인다. 물론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되면 분쟁이 폭발적으로 발생하고, 그 강도 역시 심화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중동에서 민주주의, 경제성장과 분배정의, 평화공존의 가치 실현이 빨라지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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