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조조로 환생한 한신... 이것은 초한지인가, 삼국지인가?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정사 기록 어디에도 없다. 서민을 위한 소설에는 각색이 필요했다. 도원결의(桃園結義)다. 유비와 장비의 고향은 탁현(??)이다. 관우는 고향 해현(解?)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해 나타난다. 소설에서 셋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동한 말기 황건군 민란을 일으킨 장각, 장보, 장량 형제가 먼저 등장한다. 유비, 관우, 장비 셋은 갑자기 의기투합했다. 장비가 제안했다. ‘우리 집 뒤쪽에 도원이 하나 있소. 꽃이 만발한 상태요. 내일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례 후 우리 셋이 형제 결의를 맺고 함께 힘을 합치면 대사를 도모할 수 있소’라고 했다. ‘현덕과 운장이 이구동성으로 아주 좋다’고 대답했다.
탁현은 지금의 허베이성 바오딩 줘저우(?州)다. 베이징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70㎞ 떨어져 있다.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기찻길이 줘저우를 가로지른다. 그 북쪽 시가오촌(西?村)이 장비의 고향이다. 유비, 관우, 장비가 술잔을 높이 들고 호탕하게 웃는 조각상이 있다. 오우(烏牛)와 백마(白馬)를 바치고 분향 후 재배했다.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나지 않았으나 동년 동월 동일에 죽자’고 서약했다. 지역 상인의 후원을 받았다. 유비는 쌍고검, 관우는 청룡언월도, 장비는 장팔점강모를 무기로 삼았다. 소설이 시작된다.
장비는 사망 후 환후(桓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환후묘 입구를 지나 사당에 들어서니 부리부리한 눈매에 수염이 무성한 장비가 앉아 있다. 추모 벽화가 그려져 있다. 술에 취한 장비를 살해하는 장면, 강에서 수급을 건지는 장면은 비운의 맹장 장비를 묘사하고 있다. 촉나라 영토 랑중(?中)을 지키던 장비는 부하인 장달과 범강에게 목숨을 잃는다. 수급을 들고 도주하다가 윈양(雲陽) 부근 강에 버린다. 장비묘는 세 곳에 흩어져 있다. 몸은 랑중에, 머리는 윈양에, 정신은 줘저우에 있다고 한다. 랑중의 사당에 가면 장달과 범강을 응징하는 조각상을 두고 영혼을 달래고 있다.
유비와 장비의 고향은 약 2㎞ 떨어져 있다. 기찻길이 둘을 갈라놓았다. 기찻길 남쪽 러우쌍촌(樓桑村)에는 수나라 시대 처음 건축한 칙건삼의궁(?建三義宮)이 있다. 황제의 칙령으로 세웠다는 말이다. 삼국지 영웅에 대한 우상화가 통치 수단이었다. 인의의 유비, 충의의 관우, 정의의 장비를 삼의로 언급하지만, 황제 유비의 시호를 따서 한소열제묘(漢昭烈帝廟)라 부른다. 당나라 이후 중건을 거듭했는데 문화혁명 시대에 해체돼 새로 지었다.
먼저 마신전(馬神殿)이 나온다. 유비와 관우의 애마인 적로(的盧)와 적토(赤?)가 있다. 장비가 타던 오추(烏?)와 함께 세 마리가 명나라 시대인 1506년 출정했다. 1,000년도 훨씬 지났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민간이 만든 전설이다. 한겨울 천 리나 떨어진 중원의 한 마을로 가서 보리 모종을 송두리째 훼손했다. 발자국을 따라온 주민들이 삼의궁에 항의하고 배상을 요구했다. 사당에 말은커녕 양이나 소도 없다고 주지가 항변했으나 소용없었다. 세 마리 말 조각상의 발굽 크기가 일치했고 모종 흔적이 입에 묻어 있었다. 흉년이 들면 배상하기로 약조했다. 이듬해 주민들이 다시 왔다. 축제처럼 북과 징을 치며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 말이 건드린 모종이 배 이상 대풍이었다. 기적은 늘 빠르게 날아서 퍼진다. 1508년 명나라 정덕제(正德帝)가 방문해 친필로 ‘칙건삼의궁’을 하사했다. 삼의묘였다가 이때 궁전 수준으로 확장됐다. 소설보다 더 기이한 전설이다.
마신전을 지나면 왼쪽에 장비전, 오른쪽에 관우전이 있다. 정면은 유비를 봉공하는 삼의전이다. 삼의초창(三義初創) 편액이 걸려 있다. 세 사람의 뜻이 모여 창업했다는 뜻이니 그야말로 도원결의의 의미가 생생하다. 온몸에 두른 금칠에 비해 훨씬 반짝이는 얼굴이다. 황제의 면류관을 쓴 유비가 앉았다. 관우와 장비가 협시하고 있고 오른쪽 벽에는 제갈량과 방통을 비롯한 문신들, 왼쪽 벽에는 황충과 조운을 비롯한 무장들이 도열하고 있다.
삼의전 오른쪽이 시끄럽다. 도원삼결의라 쓴 비석이 놓인 결의정(結義亭)이다. 삼국지 소설처럼 의형제를 맺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다고 한다. 마침 ‘도원결의’ 행사를 하고 있다. 행사를 관장하는 사람이 술을 따르고 비석을 바라보며 제례를 올린다. 큰형부터 순서대로 진행한다. 셋 모두 절을 하면 “동년 동월 동일”을 읊는다. 삼의궁의 특별 서비스다. 물론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행사를 돕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500위안이라고 한다. 술 한 병과 과일을 포함한 비용이다. 말로만 의형제라 하다가 '배반했네 마네' 하지 말고 증거를 남기려면 찾아가도 좋겠다.
침궁전에 유비, 관우, 장비가 나란히 앉았다. 동문(洞門) 안에는 유비의 감부인과 미부인이 다정하다. 감부인은 유비에 이어 황제가 된 유선의 생모다. 두 부인은 포로로 관우와 함께 조조에게 의탁했다. 소삼의전(少三義殿)이 있다. 젊을 소(少)가 앞에 붙었다. 세 영웅의 아들인 유선, 관흥, 장포가 대를 이어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유선은 황제가 됐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관흥과 장포는 의형제를 맺었다. 전투가 난무하는 시대라 일찍 세상을 떴다. 도원결의 현장에 아들 셋을 함께 두고 대를 이은 의리를 널리 알리고 있다.
유비는 전쟁 내내 황숙(皇叔)임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소설에서도 처음 장비를 만나 신분을 은근슬쩍 자랑한다. 한경제(漢景帝)의 아들 유승의 후예다. 배다른 동생이 한무제다. 기원전 154년 유승은 허베이 중부, 태행산 동쪽 일대의 중산국 왕으로 책봉된다. 역사에서 중산정왕(中山靖王)이라 부른다. 1968년 바오딩 만청(滿城)의 링산(陵山)에서 서한 시대 무덤이 발굴됐다. 이백, 소동파, 백거이가 지은 시에 등장하던 옥갑이 출토됐다. 고대의 황제와 귀족을 위한 염복이다. 고증 책임을 맡은 궈모러우 중국과학원 원장은 금실로 옥을 엮어 만든 금루옥의(金縷玉衣)라 부르며 감동했다. 만청한묘(滿城漢墓)는 유승과 왕비 두관의 합장묘다.
금루옥의와 함께 출토된 유물은 허베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있는 중국국가박물관이 발굴 50주년을 기념해 특별 전시를 열었다. 유승의 옥갑에 사용된 옥 조각은 2,498개, 금실 무게만 1,100g이나 된다. 많이 부식됐다고 해도 세상 어느 염복이 이렇게 화려할 수 있을까. 약간 규모가 작을 뿐 왕비 두관의 옥갑도 함께 출토됐다.
전시 유물 중에서 노리개가 눈길을 끌었다. 두관 묘실에서 출토된 18면체 청동 주사위인 동투(銅?)다. 지름이 2.2㎝라 돋보기로 봐야 한다. 금속공예의 일종인 착금은(錯金銀) 기법으로 만들었다. 상감 표면에 글자를 새기고 금과 은을 박아 넣어 만든다. 1부터 16까지 숫자와 함께 교(驕)와 주래(酒來)가 새겨져 있다. 6면은 금으로, 나머지는 은으로 새겼다. 귀족 놀이로 벌주 게임인 행주령(行酒令)을 하던 도구다. 기원전의 왕비가 이렇게 놀았구나 싶었다. 처첩이 셀 수 없이 많았던 유승은 중국 역사상 생산능력이 가장 뛰어났다. ‘한서(漢書)’의 기록에 따르면 아들만 120여 명이었다. 유승 사망 후 274년이 지나 태어난 유비는 수십만 후손 중 한 명이었다. .
금과 은으로 만든 주사위를 보니 꽃이 떠오른다. 만청에서 서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창쟈오타이촌(長角臺村)을 방문한 적이 있다. 8월 하순이었는데 여전히 한여름이었다. 겨우 차 한 대 지날 산길을 따라 힘들게 도착했다. 태행산 산골에 금은화(金銀花) 재배 단지가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짙푸른 꽃밭으로 들어갔다. 1m 높이로 자라난 줄기에 예쁘게 꽃이 피고 있다. 마침 금색과 은색이 다정다감하게 더불어 핀 꽃을 만났다. 겨울을 버티고 늦봄부터 서서히 피지만, 해발이 높은 산골이라 한여름에도 지지 않고 있다. 하얗게 폈다가 노랗게 바뀐다는 꽃인데 동시에 피니 참 신기했다.
금은화는 생김새 덕분에 별명이 많다. 꽃잎은 이보화(二寶花), 쌍화(雙花)라 한다. 덩굴은 금실이 좋다는 원앙초(鴛鴦草), 늙은이의 수염 노옹수(老翁鬚), 백로 같다고 노사등(鷺?藤)으로 불린다. 단맛이 난다고 첨등(?藤), 영어로 허니서클(honeysuckle)이다. 인동(忍冬)도 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미명이기도 하다. 매일 따서 말리고 약재와 차로 만든다고 한다. 마루에 앉아 기다리니 주전자 가득 차를 담아 온다. 보통 뜨거운 물을 붓는데 여름에는 찬물에 우려도 좋다고 자랑한다. 산골 무공해 냉수를 넣고 조금 지나니 맑은 꿀물 같은 빛깔로 변모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맛도 좋았다. 은빛에서 금빛으로 변신하는 마술을 맛보는 느낌이었다.
만청에서 서남쪽으로 150㎞를 가면 허베이성 수도인 스자좡(石家莊)이다. 루촨구(鹿泉區)에 난공불락의 포독채(抱犢寨)가 있다. 독(犢)은 송아지를 의미한다. 케이블카를 타면 중간에 산봉우리 하나를 넘고 다시 가파르게 오른다. 총 길이가 1.8㎞다. 시내 평지에서 급격하게 500m 이상 솟아오른다. 여기에 44만㎡ 넓이의 평지가 있으리라고 도저히 믿기 어렵다.
장군 한신과 관련된 전적지, 도사 장삼풍이 수련한 복지(福地)로 알려진다. 6세기 초 북위 시대 선비족 갈영이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마을 사람들이 혼란을 피해 송아지를 안고 산에 올랐다. 민란이 길어지자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포독산이 됐다. 13세기에 금나라 장군 무선이 몽골 군대와 전투를 위해 산채를 짓고 둔병을 설치했다. 포독채라 불렀다.
낭떠러지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남천문이 나온다. 천하기채(天下奇寨) 글자를 굳이 보지 않아도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지형이다. 문으로 들어서서 꼬불꼬불 길을 따라가면 한신사(韓信祠)가 나온다. 한신은 한나라 개국의 일등 공신으로 회음후(淮陰侯) 봉호를 받았다. 사당은 크지 않아도 사면의 벽화가 사뭇 화려하다. 나무 위에 옻칠을 입힌 목칠공예로 꾸몄다. 배수진(背水陣)으로 유명한 영웅 한신의 일생을 구현했다. 지명의 유래가 된 사록득천(射鹿得泉)도 보인다. 한나라 건국 초기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조(趙)나라 토벌에 나섰다.
대부대가 진군해 군영을 설치했는데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뒤져도 수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대로 며칠 지나면 전투 한 번 못하고 후퇴할 상황이었다. 심복 장수인 호신에게 물을 찾으라 신신당부했다. 호신은 온 산을 뒤지고 죽을힘을 다해 찾았으나 결국 실패했다. 주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참담한 마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천상의 신에게 기대했다. 머리를 세 번 찧고 기도한 후 나무에 목을 맸다.
호신이 나타나지 않자 상심한 한신은 초조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 군막을 나오니 하얀 사슴 한 마리가 다가왔다. 한신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사슴을 쫓았다. 백록이 멈추자 한신이 화살을 쐈다. 분명 명중했다. 하얀 불꽃이 섬광처럼 사라지고 사슴도 자취를 감췄다. 바위에 꽂힌 화살촉을 뽑으니 진주보다 맑은 샘물이 솟아났다. 한신은 호신의 주검을 찾아 성대하게 장사를 지냈다. 하늘이 감동해 보은했다고 생각했다. 이 지방 지명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사당 벽화에 폭포처럼 샘물이 솟고 사슴이 멋지게 비상하고 있다.
원나라 시대 희곡 중에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가 있다. 지은이 미상이다. 나관중 소설에 영향을 끼친 이야기 대본이다. 등장인물이나 지명은 비슷하나 장르도 다르고 내용도 판이하다. 도입부에 저승의 보원전(報?殿)이 등장한다. 이승에서의 억울한 일을 아뢰는 대목이 나온다. 맨 먼저 한신이 고소장을 접수한다. 200년도 더 지난 일을 하소연한다. 삼분천하(三分天下)를 한신에게 설파한 모사 문통(괴통)이 증인으로 출석해 ‘증거가 될 시가 있다’고 아뢴 후 읊는다.
애석해라 회음후, 고조의 근심을 덜었고(可惜淮陰侯, 能分高祖憂)
삼진을 석권하고, 연나라와 조나라를 모두 평정했으며(三秦如席捲, 燕趙一齊休)
밤에는 모래주머니로 강을 다스렸고, 낮에는 도적질한 신하를 참수했건만(夜偃沙囊水, 晝斬盜臣頭)
고조가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니, 여후가 제후를 참수했네(高祖無正定, 呂后斬諸侯).
역사가 알려준 한신을 적절하게 표현한 내용이다. ‘평화’에는 한신 외에도 주연급 등장인물이 더 있다. 상소문을 받고 천제가 판결을 내렸다. 한신은 조조, 팽월은 유비, 영포는 손권으로 환생해 이승으로 돌려보냈다. 셋 모두 개국공신이었으나 억울하게 죽었다고 고소장을 접수했다.
서한 고조 유방은 동한 최후의 황제인 헌제, 유방의 황후 여후는 헌제의 황후인 복황후가 됐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된 한신이 복수하도록 안배했다. 유비는 전략에 약하니 괴통은 제갈량으로 환생하라 했다. 보원전 재판장은 사마중달이 돼 삼국을 병합하고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라 판결했다. ‘한(韓)’ 깃발 휘날리며 진군하는 벽화 앞에서 비몽사몽이다. 이것은 초한지인가, 삼국지인가?
고지대라 사방이 낭떠러지다. 그 위에 성벽까지 쌓았으니 누가 침범할 생각이나 하겠는가? 산에 성벽을 쌓아놓고 무조건 장성(長城)이라 부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벽 따라 걸으니 시야가 넓어 시원시원하다.
산채 안으로 들어가니 자그마한 연못이 나온다. 농기구가 놓인 집이 한 채 있다. 뜻밖에도 우랑직녀가(牛?織女家)다. 우랑은 견우다. 방안에 물레를 돌리는 직녀가 앉아 있다. 7월 칠석 오작교에서 1년에 한 번 애절하게 조우하는 사랑의 전설이 느닷없이 등장할 줄 몰랐다. 온 세상을 직녀성과 견우성이 비춘다. 그래서일까. 자기 동네가 발원이라고 주장하는 도시가 많다. 최소 5곳이 죽기살기로 경쟁 중이다. 포독채는 낄 틈도 없다. 승부가 나기 어렵겠지만,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랴. 어디가 됐든 은하수 아래일 터다.
송아지를 안고 산을 올랐던 시대에도 한신 사당이 있었을까? 알 수 없다. 배수진으로 군대를 물리쳤다면 분명 강이 있어야 한다. 케이블카 타고 하산하며 눈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포독채와 관련이 있을까? 알 수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 ‘한신이 기병 2,000명을 보내 붉은 깃발을 들고 비산(?山)에서 조나라 군대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비(?)는 뿌리처럼 자라는 줄기로 약재로 쓰이며 백지(百枝)라 불린다. 비산이 포독채의 옛 이름이다. 포독채로 우회해 조나라 군대 후방을 공략해 배수진을 펼쳤다.
전투는 태행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팔형(八?) 중 하나인 정형(井?)에서 벌어졌다. 넓지는 않아도 작은 강이 흐른다. 포독채에서 서쪽 오십 리 지점이다. 쾌청한 날이면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까? 케이블카가 땅에 닿기 전에 서둘러 시선을 날려본다. 기원전, 붉은 깃발 들고 진군하는 기병의 마음으로 심장이 요동친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