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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로 산다는 것

입력
2021.08.10 22:00
27면
작년에 개봉해 몇몇 영화제에서 수상한 독립영화 ‘이장’(정승오 감독)은 네 딸과 막내아들 5남매가 아버지 묘 이장을 둘러싸고 벌이는 '웃픈' 이야기를 그렸다. ‘세기말적 가부장제와 작별을 고한다’는 홍보 문구가 강렬하다. 여기 나오는 대사. “장남 없으면 아버지 묘 이장도 못 해요? 우린 자식 아니에요? 고추가 무슨 벼슬이래요?” (영화배급사 인디스토리)

작년에 개봉해 몇몇 영화제에서 수상한 독립영화 ‘이장’(정승오 감독)은 네 딸과 막내아들 5남매가 아버지 묘 이장을 둘러싸고 벌이는 '웃픈' 이야기를 그렸다. ‘세기말적 가부장제와 작별을 고한다’는 홍보 문구가 강렬하다. 여기 나오는 대사. “장남 없으면 아버지 묘 이장도 못 해요? 우린 자식 아니에요? 고추가 무슨 벼슬이래요?” (영화배급사 인디스토리)


과문한 탓인지, 내가 아들로 태어나서인지, ‘K장녀’라는 말을 최근에야 들었다. ‘K’로 시작되는 네이밍치고는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K팝’에서 시작된 K시리즈는 드라마, 음식, 패션, 영화, 문신, 방역을 지나 드디어 딸에게까지 왔다. 접두사 K의 자격은 한국인만의 뛰어나거나 혹은 독특한 특성을 지닌 영역에만 주어진다.

그런데 다른 K와 달리 이것만은 슬펐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K장녀라는 말의 의미와 배경을 구구절절 말하기보다는 그들의 경험과 하소연을 육성으로 옮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블로그, 책, 칼럼, 기사 등에 나온 것들이다(출처 생략, 원문 일부 첨삭).

“장녀 건들지 마. 눈빛이 차분하다고 얌전한 게 아니라 차분하게 돌아 있는 것뿐이야. 건들지마, 경고했어. 크레이지 아시안 걸 중에서 제일 크레이지는 장녀야. 기억해”(아마도 2019년 7월 트위터에 올라온 이 글이 여성들에게 엄청난 피드백을 일으키며 K장녀라는 말을 태동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현관 옆방은 K장녀 방이다. 집 안에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가장 먼저 들리는 이 방은 가족의 중재자이자 가족 대소사에 과도한 책임을 느끼는 K장녀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관 옆방에 사는 나는 아빠에겐 큰아들이자 해결사이자 기대주로, 엄마에겐 대타이자 친구로, 남동생에게는 누나이자 형, 미니엄마였다.”

“사실 나는 ‘내가 바로 K장녀거든요’라고 은근슬쩍 자랑하는 편이었어. 동생 셋을 둔 장녀라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꽤나 좋은 인상을 심어주더라. 나는 K장녀답게 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하고, 심각하게 겸손하고, 늘 주변 사람을 고려해 양보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편이거든.”

“내 친구 K장녀들은 거의 비혼이다. 한 친구는 혼자 된 아버지를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도 2년째 병상의 엄마를 보살피는 24시간 간병인이 됐다. 남동생 부부와 아버지가 있지만 아무래도 내가 엄마와 감정이입이 가장 잘되고 엄마도 편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돌봄노동은 사회와 국가의 몫이 아니고 온전히 딸의 몫이다. 어른들이 말하는 엄친딸과 살림밑천의 속내는 굴레 씌우기다. K장녀는 여성에게만 대물림한 희생과 강요의 역사를 말하는 눈물 나는 표현이다. 거기엔 아무 보상도 위로도 없다.”

“항상 ‘넌 장녀니까~’라는 말이 명치에 걸린 것처럼 콱 박혀 있는 K장녀들. 이젠 나의 삶을 살고 싶지만 가족이 눈에 밟혀 주저앉고 방황하는 K장녀들. 그동안 가족 안에서 이리저리 치였던 과거와 굿바이하고, 온전히 내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장녀답게 사는 것을 멈추고, 나답게 살기 위한 장녀들을 위한 강좌입니다.” (한 심리상담소의 프로그램 소개문)

K장녀라는 신조어는 ‘어쩔 수 없다’는 자조이면서도 ‘이젠 이건 아니다’라는 이 시대 딸들의 공감이자 결의였다. 우리에겐 K장녀의 원조가 있었다. 보따리 들고 야간열차 타고 상경해 타이밍(각성제) 털어먹으며 밤새 미싱을 돌리던, 만원버스 안에서 차문에 간신히 기대 오라이를 외치던, 자기 옷은 한 벌 안 사입어도 남동생 학비를 꼬박 부치던, 우리의 큰누나와 엄마들. 이제 새로운 K장녀가 와야 할 시대다. 나도 다 큰 여식이 있다. 얘야, 굳이 ‘착한 딸’이 되려 애쓰지 말거라.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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