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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다이어리] 욱일기는 없고 스포츠만 있었다

입력
2021.08.09 16:3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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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카사 초등학교 학생들이 지난달 22일 이바라키 가시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남자축구 조별리그 B조 1차전 뉴질랜드와의 경기에서 대한민국을 응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미카사 초등학교 학생들이 지난달 22일 이바라키 가시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남자축구 조별리그 B조 1차전 뉴질랜드와의 경기에서 대한민국을 응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올림픽은 시작부터 요란했다. 성화 봉송로 독도 논란부터 욱일기, 후쿠시마 식자재 문제까지 온갖 반일 이슈가 스포츠를 덮었다. 대한체육회는 ‘한일전에서 개최국에 유리한 판정이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외주까지 줘가며 대책을 세웠다. 전쟁에 임하듯 ‘신에게는 아직 5,000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이순신 장군 패러디 문구가 선수촌에 걸렸다. 이에 일본 단체가 욱일기 시위를 감행하면서 긴장감이 돌았다. 이번 올림픽은 무슨 일이 나도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양국의 정치권, 그리고 호전적 일부 기성세대의 우려일 뿐이었다. 경기장에서 욱일기나 한일 충돌은 없었다. 배구, 탁구 등 여러 한일전 속에서도 감정싸움은 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뒤 서로를 격려하는 스포츠맨십을 보여줬다. 이미 여러 국제대회에서 경쟁해 온 선수들에게 일본은 넘어서야 할 선의의 스포츠 라이벌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일본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기자가 강조하자 불편함을 토로한 선수도 있었다. “저는 정치적인 것들은 잘 몰라요.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꼭 일본에 가서 일본을 이기겠다, 일본에 애국가를 울리겠다. 그런 건 없거든요? 그냥 저는 저를 위해서 금메달을 따고 싶은 것뿐이에요.”

‘일본만은 무슨 수를 쓰든 이겨야 한다’는 건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사실 일본뿐만이 아니다. 스포츠에서 ‘무슨 수를 쓰든’은 허용되지 않고 ‘이겨야만 하는 나라’도 없다. 최고가 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선수들은 국가나 조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나 자신과 약속을 이루기 위해 상대를 마주한다. 패배하면 아쉬움에 눈물을 삼킬지언정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난다. 다음 올림픽을 기약하는 젊은 선수의 쿨한 모습에 어떤 관계자는 “재수하면 된다고 웃어넘기는 수험생의 모습 같다”고 비교하기도 했다.

죄인처럼 눈물의 사죄를 할 필요는 없다. 사과가 필요하다면 오히려 국가가 해야 한다. 황선우(수영) 우상혁(높이뛰기) 우하람(다이빙) 서채현(스포츠클라이밍) 등 우리 선수들은 선진국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오직 제 능력으로 세계 최강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스포츠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든다’고 한다. 올림픽 17일 동안 23곳의 현장을 갔다. 한 인간이 최고의 자신이 되는 순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즐길 수 있는 축제도 아니었고 제약도 많았지만, 배지를 교환하고 주먹 인사를 한 몇몇 외신 기자와 자원봉사자가 기억에 남는다. 미디어 호텔과 메인프레스센터(MPC)에서 흘러나왔던 존 레넌의 '이매진'도 좋았다. “국가가 없다고 생각해 봐. 종교가 없다고 생각해 봐. 세상은 하나가 될 거야.”

도쿄= 최동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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