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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₂O를 위한 음악

입력
2021.08.11 04:30
22면

편집자주

허명현 클래식 평론가가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합니다. 경기아트센터에서 근무 중인 그는 공연계 최전선에서 심층 클래식 뉴스를 전할 예정입니다. 오페라에서 가수가 대사를 노래하듯 풀어내는 '레치타티보'처럼, 율동감 넘치는 기사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물은 오랜 시간 작곡의 영감이 돼 왔다. 하지만 물의 속성을 음악으로 연주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물을 묘사한 라벨의 피아노곡 '밤의 가스파르'는 최고난도 작품 중 하나다. 게티이미지뱅크

보기만 해도 시원한 물은 오랜 시간 작곡의 영감이 돼 왔다. 하지만 물의 속성을 음악으로 연주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물을 묘사한 라벨의 피아노곡 '밤의 가스파르'는 최고난도 작품 중 하나다. 게티이미지뱅크

더운 여름, 음악을 듣는 행위로 시원해질 수 있을까? 그렇다 치면, 그럼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까? '물'을 주제로 다룬 음악들은 어떨까? 물이 주는 심상은 시원함 그 자체다. 지금은 떠날 수 없지만, 이 시기쯤 우리는 바다나 계곡으로 시원한 물을 찾아 떠나곤 했다. 이제 심상은 찾았으니, 다음은 편성. 여러 악기가 등장해서 경쟁하는 음악에는 여백이 없다. 귀가 피곤하면 더울 수밖에. 독주 악기가 등장하는 작품이 산뜻해 보인다. 그중에서도 현대적이고 차가운 소리를 가진 피아노가 제격이다.

사실 음악계에서는 수소와 산소의 결합물인 물(H₂O)을 묘사하려는 시도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의 '에스테 별장의 분수'가 대표적이다. 그 당시 리스트는 지금의 방탄소년단(BTS)만큼이나 전 유럽에서 유명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다. 그의 연주를 듣다가 기절하는 여성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그의 물건들을 수집하려는 팬들도 속출했다. 이 팬클럽을 가르켜 리스토마니아(Lisztmania)라 불렀다. '에스테 별장의 분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탈리아 여행 중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쉽게 물을 흩날리는 분수를 상상할 수 있으며, 흩뿌려지는 물입자들과 이를 빛나게 하는 햇빛까지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의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효과는 후대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프랑스의 두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과 클로드 드뷔시(1862-1918)는 물 자체에 집중해 더욱 개성적인 음악을 만들어 낸다. 라벨은 특히 물에 관한 음악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작품 '거울' 중 '바다 위의 작은 배'는 잔잔히 움직이는 바다를 보여준다. 왼손은 물결음형을 연주하고, 오른손은 그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배를 표현하며 작품이 시작한다. 또 다른 작품 '밤의 가스파르' 중 '물의 요정'에서는 물에 대한 라벨의 상상력과 묘사력이 극대화된다. 쏟아지는 32분음표들을 타고 물의 요정이 등장한다. 요정과 함께 물이 이리저리 튀는 장면에서는 음악이 시각과 촉각으로 전이된다. 라벨의 피아노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물의 유희'의 경우 물방울의 움직임 그 자체가 음악이 된다. 음표는 물을 머금고 질주하기 시작한다.

드뷔시는 더욱 과감하다. 자유로운 물의 움직임을 위해 기존의 화성을 벗어난다. 드뷔시는 "음악의 목적이 아름다움 그 자체여야 한다"고 선언하며, 전통적 방법에 이별을 고했다. 그의 작품 '영상' 중 '물의 반영' 에서는 흔들리는 물결이 음악의 주제가 된다. 반영(反影)은 물에 반사된 그림자를 뜻한다. 물결의 미묘한 떨림은 마법처럼 소리로 치환된다. 이후 드뷔시 음악에 매료된 일본의 작곡가 도루 다케미쓰(1930-1996)는 '레인 트리 스케치(Rain Tree Sketch)' 등 또 다른 H₂O로 구성된 음악들을 만들어 나갔다.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시각으로, 또 촉각으로 전달된다. 그의 음악을 따라가다 보면 축축한 느낌마저 든다.

물을 다룬 작품들의 공통점은 연주하기가 아주 까다롭다는 점이다. 특히 '밤의 가스파르'는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피아노 작품으로 꼽히곤 한다. 피아니스트는 물의 생생한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극한의 테크닉을 보여줘야 한다. 아주 센 음에서 아주 여린 음으로 순식간에 이동해야 하며, 음은 부드럽게 이어서 또 끊어서 연주해야 한다. 거기에 피아니스트는 다채로운 음색까지 챙겨야 한다. 물의 시원한 심상을 즐기는 관객들과는 달리 피아니스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분투한다. 게다가 피아니스트의 화려한 기술들이 돋보이면 실패한 연주다. 이리저리 통통 튀는 물의 모습이 보여야 비로소 성공적 연주가 된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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