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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보다 과정, 달라진 올림픽 관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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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마다 개최되는 하계 올림픽이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일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열리게 되었다. 운동에 1도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TV 응원에 열을 올리는 것은 아마도 평소에는 거의 접하기 어려운 종목에 출전한 선수들이 선사하는 감동 때문일 것이다.
"금메달은 참 좋은 거야. 하지만 그것이 없어서 채워지지 않는다면 있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아." 다양한 사연을 가진 자메이카인들이 우여곡절 끝에 봅슬레이팀을 구성해서 결국에는 동계 올림픽 출전에 성공하게 된다는 영화 '쿨 러닝(cool runnings)'의 명대사이다. 1년 내내 더운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동계 스포츠를 선택하게 되는 파토스(pathos)와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토대로 공동체의식을 가지게 되는 에토스(ethos)의 결합을 통해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올림픽 정신을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올림픽은 우리 선수들의 선전을 통한 대리만족 이외에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으나 오른쪽 팔꿈치가 없는 탁구 선수가 최선을 다해 경기를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을 이기는 것이 가장 힘든 승부'라는 들리지 않는 외침이 스크린을 통해 가슴에 전달되는 순간 남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괴롭혔던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결승점에 1초라도 빨리 들어가기 위해 단 한 명이라도 추월해야 하는 살벌한 트랙경기에서 자신을 실수로 넘어뜨렸던 선수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뭉클한 기분에 빠져들기도 한다.
니체는 '어떤 것의 가치는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했는데 그 선수는 '올림픽에 참여한다는 것'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실현한 셈이다.
어렵게 출전한 대회에서 반드시 상대방을 쓰러뜨려야 다음 경기에 진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한 직후 승자에게 엄지척을 보이는 패자의 여유는 가식적이라기보다 철학적이다. 이안 로버트슨은 저서 '승리자의 뇌'에서 '승리자만이 삶을 스스로 통제한다고 느낀다'고 했지만 패배를 승복하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모습은 승패를 초월한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몇 년에 걸친 피땀이 한순간의 승부로 끝난다는 것과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올림픽은 선거와 유사하다. 또한 상대방의 실수가 곧 나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네거티브 공세에 대한 유혹을 강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올림픽은 우리 편이 아닌 상대 선수도 응원하게 되는 승패 자체와는 무관한 환호와 감동의 드라마이다. 부끄럽게도 올림픽 입장식 때 어느 방송국은 각 나라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단편적인 사실을 대표적인 상징물인 양 표기하는 오만을 저질렀고 중계 도중에 다른 나라 선수의 실수를 조롱하기도 했다. 올림픽 참가를 위해 구슬땀을 흘렸던 선수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자극적인 문구로 말초적인 재미만을 추구하는 부끄러운 중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륜기가 세계평화를 기원한다는 점에서 짜증을 유발하는 중계는 오히려 정신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 올림픽은 화려한 언변으로 승리의 환호에 집착하는 전쟁터가 아니라 땀의 결실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여는 화합의 잔치로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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